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평생 4명의 여인을 사랑했다. 펠리체 바우어, 율리 보리첵, 밀레나 예젠스키, 도라 디아만트이다.
1912년 8월 13일에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의 집을 방문했다. 저녁에 카프카는 베를린에서 온 펠리체 바우어(1887~1960)를 만났다. 그는 29세, 그녀는 25세였다.
카프카는 이 만남을 일기에 적어 놓았다. "내가 8월 13일 브로트에게 갔을 때 그녀는 식탁 옆에 앉아 있었으며 마치 하녀처럼 보였다. 그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는 곧바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갈색의 뻣뻣한 머리카락, 못생긴 코, 큼직한 턱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인 그녀는 목이 파인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브로트의 집을 나와 펠리체가 머물고 있는 호텔까지 걸어갔다. 호텔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카프카에게 “베를린으로 한번 놀러 오세요.”라고 말했다.
1912년 10월 말부터 두 사람은 편지 왕래를 시작했다. 펠리체는 녹음기 회사의 속기사로, 낙관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으로 직장에서 성공을 거둔 여성이었다. 그녀의 유능함에 경탄했던 카프카와는 달리 그녀는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카프카는 오랜 망설임 끝에 1914년 6월 1일에 카프카는 베를린의 펠리체 집에서 약혼식을 올렸는데, 7월 12일에 파혼한다. 당시에 카프카는 "나는 죄수처럼 묶여 있다. 사람들이 나를 진짜 사슬로 묶어서 구석에 앉혀서는 내 앞에 경찰을 세우고 단지 이러한 방식으로 구경하도록 했더라도 지금 상황보다 더 화나지 않았을 것이다"(1914년 6월 6일)라는 반응을 보였고, '내 내면적 삶을 서술하는 것의 의미는 다른 모든 것들의 의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라고 일기에 썼을 정도로, 문학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결혼이 글쓰기에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파혼 직후 『소송(Der Prozeß)』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은행 대리 요제프 K는 아무런 영문도 없이 체포된다.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변호하려고 했지만 결국 사형당한다. 한편 『소송』의 뷔르스트 양은 약혼녀 펠리체를 연상시킨다. 카프카는 소송을 1915년까지 집필했지만 미완성이었고, 카프카가 죽은 다음 해인 1925년에 출판되었다.
1916년 여름에 카프카와 펠리체는 마리엔바트에 있는 호텔에서 다시 만난다. 이들은 열흘간 같이 지냄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이때 카프카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아마도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가느다란 개울이 한 가닥 흐르고 있는가 보다. ... 그 누구와의 공동생활이 견딜 수 없다. 공동생활이 유감스러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17년 8월 6일에 다시 약혼한다. 카프카는 결혼으로 인하여 자신의 창작 생활이 방해를 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까 두려워하면서도 펠리체와의 결혼이 사회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그런데 카프카는 사흘 뒤인 8월 9일에 각혈을 했다. 당시에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이었다. 그는 12월에 펠리체와 다시 파혼한다. 그는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편 카프카와 헤어진 펠리체는 1919년에 베를린의 부유한 상인과 결혼하여 스위스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60년에 죽었다.
흥미로운 점은 카프카와 펠리체는 1912년부터 약 5년간 교제를 하면서 5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없앤 반면, 펠리체는 카프카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카프카의 명성이 높아지자 막스 브로트는 펠리체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책으로 내자고 설득했으나 펠리체는 거절했다. 카프카의 편지들은 펠리체가 죽고 난 후인 1967년에야 출간되었다. (조성관,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 열대림, 2009,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