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1회]-이순신, 현덕승에게 ‘약무호남시무국가’ 편지를 쓰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1회]-이순신, 현덕승에게 ‘약무호남시무국가’ 편지를 쓰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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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이순신은 한산도 근처에 있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사진 1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안내판​​​​​​​사진 2 한산도 통제영 입구 (한산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안내판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황진, 최경회,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 등이 전사했다고 한다.

7월 14일
진영을 두을포(통영시 한산면, 지금의 한산도)로 옮겼다.

7월 16일에 이순신은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편지를 썼다.
“(전략) 난리를 치른 후 그리운 마음 간절했는데, 뜻밖에 하인 편으로 이달 초에 띄어 보낸 편지를 받아 급히 읽어보고 위로 받음이 평상시 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런 난리 중에도 옛정을 잊지 않고 멀리까지 위로해주고 또 여러 가지 선물을 받고 보니, 모두가 진중에서는 진귀한 물건 아닌 것이 없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느 날에야 전쟁을 끝내고 평소처럼 같이 놀고 싶어 하던 정회를 실컷 풀어볼 수 있을는지요. 막상 편지를 쓰려고 종이 앞에 앉으니 공연히 슬픈 생각만 간절해집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마음이 산란하여 이만 씁니다.”

그랬다. 조선 8도 중 유일하게 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호남은 병참 기지, 병력송출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호남이 조선을 살린 것이다.

8월 15일에 조정은 삼도수군 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종래에 수군절도사 3명 (이순신·이억기·원균)이 협의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던 체제가 1인체제가 된 것이다.

사진 1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안내판​​​​​​​사진 2 한산도 통제영 입구 (한산문)
한산도 통제영 입구 (한산문)

선조의 임명교서를 읽어보자
“돌아보건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른바 통솔할 이가 없음인 바, 서로 제 형편만 지킨다면 어찌 팔이 손가락 놀리듯 할 수 있으며 또 서로 관할하고 통섭함이 없으면 혹은 뒤늦게 오고 혹은 앞서 도망가는 폐를 면하지못할 것이다.”(이민웅, 이순신 평전, p 245)

한편 10월 1일에 선조가 서울로 돌아왔다. 1592년 4월 30일에 서울을 떠난 지 16개월 만이었다.
경복궁 창덕궁등이 불탄 터라, 선조는 정동의 월산대군의 옛집(지금의 덕수궁)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1593년 하반기에 들어서 왜군은 해전을 회피한 채 강화회담 진행 상황을 주시하면서 경상도 해안과 성을 쌓고 장기 주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윤 11월 3일에 견내량을 순찰 중인 복병장 나대용은 왜군 정찰병 1명을 산채로 사로잡아 이순신에게 보냈다. 이순신은 왜군을 심문하여 윤11월17일에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 견내량 요충지 한 곳에 장수를 정하여 매복시켰는데, 윤 11월 3일에 복병장이며 신의 군관 주부 나대용이 왜적의 정탐꾼 1명을 산 채로 사로잡아 신에게 묶어 보냈기로 문초한 바, 그가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은 망고질지이고 나이는 25세이며 거주지는 일본국 시거구(시고쿠 사국)인데, 작년(1592년) 12월 중에 조선으로 나온 조승감(조소아베 모도지카)이 거느린 군사 3천여 명이 패한 후, 군사 6백명을 더 뽑아 보낼 때 활쏘는 군사로 뽑혔으며, 거느리는 장수는 온노질기였습니다.

금년(1593년) 2월 2일 시거구(시코쿠)에서 배를 탔는데, (...) 윤 11월1일에 도망쳐서 굴을 캐는 여인 3명을 만났는데 그 여인들이 소인을 붙잡고 소리치자 조선의 전선이 뜻밖에 달려와서 결박하여 싣고 온 것입니다. ... ’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나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적들의 형편을 대강 진술받았으나 더 추궁할 것도 있을 것 같아서 목을 매어 도원수 권율에게 압송하였습니다.

한편 거제의 양가집 여인 세금 등 3인은 피난 중에 굶주리고 지쳐있는 여인들이면서도 왜적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힘을 합쳐 왜적을 붙잡고 복병장을 불러 결박하게 하였으니, 저 소문만 듣고도 도망쳐 달아나는 사람들과 천 번 만 번 다르므로, 각별히 타이르고 아울러 양식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본 받도록 권장하고자 하오니, 본 도 감사에게 분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154-157)

이순신의 장계로 조정은 나대용의 공을 알게 되었다. 이 공로는 1594년 8월에 나대용이 강진현감에 제수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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