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 8월 5일에 선조는 주부(종6품) 나대용을 강진현감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나대용은 1596년 10월 11일에 파직당할 때까지 2년 2개월 동안 근무했다.
강진현은 관할이 지금의 강진군과 완도군이었고, 병마절도사 병영도 있었다.
진보는 가리포진(加里浦鎭), 고금도진(古今島鎭), 마도진, 신지도진(新智島鎭)이 있었다.
나대용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휘하로 편입되었다. 강진현감은 전라우수군 14관 중에 소속되었다.
당시는 한산도 통제영에 충청, 전라, 경상도의 수군들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각 고을 수령들이 직접 한산도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가끔 대장(代將)을 임명하여 수령의 임무를 대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강진현감 역시 한산도와 관할 고을을 왕래하면서 통제사 이순신의 수군 운용에 따랐다고 본다.
『난중일기』를 보면 1595년 1월 27일에 강진현감 나대용은 새로 부임한 영암군수와 함께 영암군수와 함께 통제사 이순신에게 공식인사를 하였다. 1594년 8월 임명 이후 5개월 만이었다. 이어서 2월 21일에 나대용은 보성군수, 웅천현감, 소비포 만호와 함께 이순신을 만났다.
그런데 1596년 2월 13일에 이순신은 강진현감 나대용이 약속한 날자를 어기고 한산도에 늦게 온 죄를 다스렸다. 가리포 첨사는 보고를 하고 늦게 왔으므로 타일러서 내보냈다.
2월 14일에 이순신은 강진현감이 보러 왔기에 위로하고 술을 주었다.
2월 23일 늦게는 거제현령, 고성현령, 하동현감, 강진현감. 회령포만호 등이 와서 이순신은 고성에서 가져온 술을 함께 마셨다.
이어서 3월 8일과 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3월 8일
아침밥을 먹은 후 공무를 보러 나갔더니 우수사·경상수사·좌수사·가리포만호,방답첨사·평산포만호·여도만호·우우후·경상우후, 강진현감들이 와 있었다. 하루내내 취하도록 마신 뒤 헤어졌다.
3월 9일
강진현감이 돌아간다고 하기에 술을 먹였더니 잔뜩 취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1596년 윤 8월에 이순신은 전라도를 시찰하였다. 이순신은 윤8월 22일에 강진병영에 이르러 전라병사 원균을 만났고, 8월 24일에 가리포를 시찰하고 다시 병영으로 돌아왔다. 이 때 강진현감 나대용도 이순신을 만났으리라.
그런데 1596년 10월 11일에 선조는 강진현감 나대용을 파직시켰다.
이 날의 『선조실록』을 읽는다.
“ 사헌부 장령 윤형이 와서 아뢰었다.
수산군(守山君) 이지(李智)는 난리 초에 한갓 종군(從軍)을 자원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은 것만도 이미 분수에 넘친 것인데, 그 뒤에 조그마한 공도 전혀 없으면서 없는 사실을 그럴싸하게 꾸며 각처의 수신(帥臣)들에게 올림으로써 후일에 포상을 받을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을 살펴보건대 지극히 형편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그 아들을 시켜 외람되게 상소하여 2품의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매우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개정을 명하소서.
비변사는 이지(李智)가 공로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함부로 상가(賞加)를 청함으로써 공없는 사람에게 마구 베풀어지게 하였으니, 그 사사로운 정분을 따라 마음 쓴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유사 당상도 아울러 추고 하소서.
강진현감 나대용은 사람됨이 간교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주제넘으며, 술과 떡 같은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명성을 구하고 남의 말(馬)을 약탈하여 뇌물로 썼습니다.
그리고 사신이 바다를 건널 때에는 수호용 선박을 배정하는 것이 전례인데 보내지 않았으니, 형편없이 관직을 수행하며 사명(使命)을 멸시한 죄가 큽니다. 청컨대 파직을 명하소서. ”
이러자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 ‘수산군은 그와 같이 논할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선조의 조치는 참 차별적이다. 왕족 이지는 비호하고 나대용은 파직시키다니.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