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독일 슈테델 미술관 기행 [17회]
김세곤의 독일 슈테델 미술관 기행 [17회]
  •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4.11.2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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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 화형에 처해지다.

사보나롤라(1452~1498)는 개혁 초기에는 시민적 자유와 종교적 삶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민적 덕성의 함양을 위해서라도 신앙의 회복이 중심이 된 도덕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처음부터 고수했고, 1497년에 정치적 위기가 점차 심각해지자 오히려 도덕적 개혁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보나롤라 초상(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림)
사보나롤라 초상(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림)

1497년 2월 7일 피렌체 시뇨레 광장에서 소위 ‘허영의 소각’이 있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헛된 것들 즉 사치스러운 옷, 장신구와 보석, 불온서적 이교적인 작품, 불순한 그림, 그 외의 ‘악마의 도구들’을 거대한 장작더미의 불길 속으로 던졌다.

화가들도 동참했다.
그들이 그린 소묘와 그림을 불길 속으로 던져넣었다. 보티첼리의 친구인 로렌초 디 크레디는 외설스럽다고 생각한 습작 누드 몇 점을 불길 속에 던졌다.
보티첼리 역시 당시 상황에 휩쓸려 그림 여러 점을 불태웠다고 하는데, 그저 추측일 뿐이다.

그런데 1497년 5월 12일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는 사보나롤라를 파문했다. 사보나롤라가 교황 알렉산드레 6세의 타락과 부패를 강경 비판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러자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사면시키기 위해 청원서를 올렸고 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는 보티첼리의 형 시모네도 끼어 있었다.

교황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시보나롤라의 영향력이 커지자 교황은 설교를 포기하면 추기경 자리를 주겠다고 사보나롤라를 회유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은 하느님의 명을 받고 교황과 대적하고 있는 것이라며 설교를 계속하였다.

1498년에 들어서자 피렌체에 역병과 흉년이 닥쳤다. 이러자 사보나롤라의 지지기반이 약해졌고, 이틈을 이용하여 반(反)사보나롤라 세력이 뭉쳤다.

1498년 3월 사보나롤라에 반감을 품고 있던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도사가 평소 신의 계시라고 말한 사보나롤라의 은총을 입증하는 ‘불의 심판’을 받자고 제안했다.
그 수도사는 사보나롤라가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화상을 입지 않으면 그를 ‘하느님의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순식간에 한 수도사의 제안에 흥분하여 당장 실시하라고 재촉했다.
사보나롤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 7일에 시뇨레 광장에는 ‘불의 심판’을 위한 제단이 준비되었다.
그런데 사보나롤라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끝내 광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가 ‘완전 사기꾼’이었다며 분노했다.

시뇨레 광장의 사보나롤라의 처형 (1498년 작가 미상)
시뇨레 광장의 사보나롤라의 처형 (1498년 작가 미상)

결국 다음날 사보나롤라와 그의 제자들은 폭도들에게 체포되었으며. 4월19일에 종교재판이 열려 이단죄, 분파 활동죄, 로마 교황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5월 23일 아침, 사보나롤라와 그를 따르던 두 명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들이 피렌체의 시뇨레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지난 4년 동안 피렌체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꿈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당시에 피렌체에 살았던 마키아벨리(1469-1527)는 1513년에 저술한 『군주론』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고, 거짓을 둘러댔다. 무력을 갖춘 예언자는 모두 성공하지만, 무력을 가지지 못한 예언자는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