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휴대폰에서 짧은 신호음이 들린다. 아들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다. 아들은 다른 마을에 혼자 살고 있다. ‘아버지, 밤새 첫눈이 내렸어요.’ 나는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어둑신한 거실로 나가 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바라본다. 아, 이곳은 아직 눈이 내리지 않고 있다.
눈이 곧 내리겠지 하며 아들의 눈을 통해 눈 내리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눈이 수북이 내려 풍경을 하얗게 덮고 있다. 눈송이들이 테니스장 가로등 불빛을 비켜 펄펄 날리고 있다. 나는 오래 그립던 이가 소식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 같은 반가움, 기쁨으로 가슴이 마구 설레인다.
이것은 선물이다. 나무숲이며 공터에 있는 작은 정자, 단지를 둘러싼 쇠울타리, 길바닥, 모든 것들이 하얀 눈에 덮여 있다. 사람은 기척도 없다. 아직 눈이 온 줄 모르고 다들 자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다.
나 혼자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은 듯한 벅찬 느낌. 갑자기 내가 천국에 발을 내디딘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 지상은 이렇게 천국이 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이 내리덮으면 세상은 천국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한 소식이다.
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첫눈을 나는 보았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바라보는 듯한 감정에 휩싸인다. 기적과도 같이 찾아온 첫눈. 세상 모든 것들이 하얀 눈에 덮여,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없어진 듯하다.
만일 내가 북방의 개마고원에 가고 싶다면 아무도 나를 못 간다며 막아서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불현듯 어느 먼 나라로 국제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여기는 눈이 왔어요. 그곳에도 눈이 왔어요?” 이 눈의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나무도 눈 풍경 속에 함께 한다.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하얀 눈에 덮여 서로 하나가 된 장면이다.
오늘 아침, 나는 누구라도 마주치면 ‘첫눈이 왔어요’라고 인사를 하고 싶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에게, 눈을 쓰는 미화원에게, 마을버스 운전기사에게. 눈이 내리기 전에는 떨어져 있던 소소한 일상들이, 눈 덕분에 이렇게 따뜻하고 한결 가까워 보인다.
세상의 온갖 이념도, 갈등도, 불안도 모두 설경 속에서는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눈 풍경은 어떤 갈등이나 미움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마법과도 같다.
나는 첫눈이 만든 천국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인사를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눈의 나라는 그런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으니까. 이 하얀 눈은 모두가 같은 세상,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순간을 만들어준다. 보라, 세상이 눈에 덮여 한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눈에 덮인 하얀 세상으로 외투 깃을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다. 먼 북국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마치 설국의 끝자락으로 걸어가듯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설국은 단순히 차가운 겨울 풍경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복음이다. 눈이 내리면, 우리는 서로를 더 이상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된다. 그저 같은, 하얀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로만 느껴진다.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무엇을 했는지, 내가 부자인지 빈자인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같은 풍경 속에서 고요하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눈이 내린 풍경 속에서 나는 그저 여기에,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다. 눈이 내린 세상에서는 무엇을 말할 필요도, 무엇을 바랄 필요도 없다. 그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선하게 공존할 따름이다. 시인이 ‘괜찮다’, ‘괜찮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세상은 괜찮다.
이렇게 첫눈이 내린 날, 나는 그저 바라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얀 눈 속에서, 그 안에서 나는 그저 기쁘고, 행복하며, 온 세상과 하나가 된다. 오늘 같은 날,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세상 모든 것,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다.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한 순간이다.
하얀 눈이 내린 이 아침, 나는 깨닫는다. 내가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그 소중함은, 눈처럼 순수하고 정갈하게 나의 마음속에 쌓인다. 눈은 이처럼 상상 속에서도 충분히 세상을 소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