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V자 형태 폭침”
“우키시마호 V자 형태 폭침”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9.10.19 10:21
  • 댓글 3

조선인 징용자 7500여명 중 5000여명 사망·행불
인터뷰-한영용 우키시마호 사건 배상추진위원장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 일본교토 마이즈루 항에서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4730t)가 의문의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우키시마호 폭침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는 이 사고로 조선인 징용자 7500여명 가운데 5000여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고 밝혔다.

생존자는 불과 1천5백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후 들뜬 마음으로 귀국선을 탔던 징용자들 대부분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조선인 3735명과 일본해군 255명 승선자 중 조선인 524명과 일본군 25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폭발사건의 진상도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채 ‘설왕설래’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단순사고라고 발표했지만 생존자들과 54년 선채인양 당시 진상조사에 나섰던 ‘일조우호협회’는 폭침설을 주장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연맹 아오모리 현 본부도 1945년 말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에 우키시마호 사건을 전범사건으로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지난 12일 한영용(67·서울) 우키시마호 사건 배상추진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이날 미쯔비시 자동차 광주전시장 철수를 촉구하는 1인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945년 8월24일 일본교토 마이즈루항서 의문의 폭발사고

▲ 한영용 위원장
▲ 우키시마호 사건과는 어떤 관련이 있나.

- 1945년4월 부친께서 일본 아오모리 현으로 징집돼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우키시마호를 타고 귀국하다 폭침사건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내 나이가 세 살이었는데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아직까지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다.

▲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조선인 징용자는 얼마나 되나.

- 일본 아오모리 현에 조선인 징용자 9000여명이 끌려갔다. 해군특수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관할지역인 시모키타 반도 일대와 미사와 비행장, 가바야마 비행장 등에 군인·군속 4000명, 하청을 맡은 민간업체에 5000명 등 조선인 징용자 9000여명이 그곳 군사시설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해군은 18일부터 “이제 더 이상 배급은 없다”, “이것이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배”라며 대대적인 승선작업에 나섰다. 승선작업은 3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멀리 북해도에서부터 미사와 비행장, 이와테 현과 아오모리 현에 흩어져 있던 강제징용자들이 귀국선을 타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시모키타 반도의 공사현장 분포와 각 하청업체에 배치한 인력, 해군부대 규모, 가바야마 비행장과 미사와 비행장에 투입한 조선인 수, 북해도와 이와테 현에서 들어온 조선인 수, 가족생활자 등을 감안해 최소 7500여명이 승선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 영화 ‘살아있는 영혼들’에서도 7,500여명이 승선한 것으로 나온다.

▲ 일본이 서둘러 승선작업에 나선 이유는 뭔가.

- 일본은 당초 소련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할린과 북해도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특히 해방이후 북해도의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합세해 비밀을 누설하고 일본경찰서까지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인 노무자들이 가장 많았던 아오모리 현에서는 이들이 소련군과 합세하는 것을 크게 걱정했다. 그 때문에 해군시설부의 주도로 조선인에 대한 이송작업이 급작스럽게 시작됐다.

▲ 우키시마호가 폭파됐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있나.

- 우키시마호가 직선코스를 따라 항해했다면 8월24일 이전에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항로를 취했다.

또 교토 마이즈루 항 도착 직후 일본 승무원 255명 가운데 230명이 빠져나가 참사를 면했다. 폭발물을 설치하고 작동시킬 최소인원 25명만 남겨두고 탈출한 것이다. 승선명부도 작성하지 않았다.

폭발당시 114m 길이의 배가 V자 형태로 솟아올랐다가 그대로 침몰했다. 그리고 9년 동안이나 시신발굴과 배 인양작업을 실시하지 않았다.

▲ 일본정부가 사망자 수를 축소했다는데.
▲ 한영용 위원장


- 일본은 우키시마호 사건발생 일주일 후인 9월 1일 조선인 524명과 일본군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GHQ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조선인 260명 사망’으로 그마저도 축소·조작해 보고했다.

사고 이틀 뒤부터 시모사바 해안가에 수백구의 사체가 밀려왔지만 일본군들이 시신을 한데 모아 마이즈루 항 계곡 해병단 뒷산 골짜기에서 불태운 뒤 암매장했다. 그들의 신원은 밝혀지지도 않았다. 또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하지도 않고 사망자 수를 확정해 발표한 것도 납득이 안된다.

인양작업은 1950년 처음 이뤄졌다. 우키시마호를 재활용하기 위해 인양작업을 펼치다 유골 103구를 회수했다. 하지만 기관부가 훼손돼 사용할 수 없자 인양작업을 중단하고 남겨진 사채를 그대로 방치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지 9년 후인 1954년 두 번째 인양작업에 나서 유골 245위를 회수했다. 1945년 9월 최초 발표 때보다 사망자 수가 348명이 더 늘어나 전체 사망자 수는 872명 됐다. 하지만 일본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24명 사망설을 고수하고 있다.

▲ 구조 활동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시간이 오후 5시20분이다. 일몰시간(서울기준 19시13분)을 2시간 정도 앞둔 상태였다. 구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2시간 남짓밖에 없었다.

교토 마이즈루 어부들이 소형 어선으로 구출작업에 나섰지만 구조장비도 변변찮고 해상구조 훈련조차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한계가 많았다. 특히 사람들이 많은 쪽은 접근조차 못했다.

그 때문에 구출된 인원은 불과 소수에 그쳤다. 그런데도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3천211명을 구조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일본 524명 유골 합골 뒤 분골해 일부 유족 전달 ‘인면수심’

▲ 인양한 시신과 유골들은 어떻게 됐나.

- 524명의 유골과 이후 수습된 348명의 유골을 아오모리의 동본원사 별원에 안치했다가 지금은 동경 메구로에 있는 유텐지(祐天寺)에 보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사체를 유기하고 합골한 유골을 분골해 나눠주는 야만적인 범법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71년과 74년 524위의 유골 중 230위를 유족에게 전달했는데 그때 합골 사실을 감췄다. 현재 280위의 유족들은 “이렇게는 모셔올 수 없다”며 유골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

유골을 받아온 유족들도 최근에 그 사실을 알고 나머지 280위가 돌아오면 그 장소에 함께 유골을 모시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사죄와 진상규명 그리고 배상이 이뤄지고 난 뒤 유골을 한 자리에 안치해 합동위령제를 올려야 한다.

▲ 한영용 위원장
▲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진행한 걸로 알고 있다.

- 1992년 8월25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가 77명의 희생자 유족과 생환자를 원고로 교토지방재판소에 이 사건을 제소했다. 교토지방재판소는 소송 9년만인 2001년8월23일 일본정부가 안전배려 의무를 위반했다며 생존자 15명에게 각 300만 엔씩 총 4500만 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원고 쪽이 요구했던 공식사과와 진상규명을 포함한 손해배상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2003년 5월30일 1심 재판을 번복하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들이 즉각 항소했지만 도쿄 최고재판소가 최종 기각 판결을 내려 재판이 종결됐다.

▲ 문제해결을 위해 정치권에 호소한 적은 없나.

- 2001년 10월5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진정서 처리결과를 통보했다. 우키시마호 사건이 8·15 이후 발생해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일본의 귀책사유가 입증될 경우 일본정부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지난달 30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치 100년 안에 교토 마이즈루만 학살 희생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지도록 일본정부에 즉각 공식사죄를 받아 달라고 탄원서도 올렸다.

▲ 일본의 새 정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 일본 새 총리가 당연히 과거사를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과 우호관계도 개선될 수 있다. 세계강대국 일본이 독일과 같이 모든 것을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

일본은 그동안 태평양 전쟁으로 사망한 자국민 240만명 가운데 70%의 유골을 찾아줬다. 억울한 원혼들이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의 유골도 돌려줘야 한다. 


댓글 3
역시 2010-07-18 11:52:11
거의 모든 포탈 사이트에서 검색해 봤지만 제대로 검색조차 안되고 있는 사건...
실시간 검색순위 다음에서는 1위를 하고 있으나 타 포탈에서는 순위에도 없네요...
유독 다음에서만 1위를 하고 타 포탈에서는 순위에도 안들 수 있는 검색어가 있을 수 있나요?
아직까지도 쪽빠리추종자들이 많고, 영향력 또한 엄청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김태환 2010-07-18 11:41:57
그들은 반성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군국주의를 부활하여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욕심많이 가득할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사과? 배상? 웃기지 마라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일본을 이길수 없다 그러나 단결된 국론과 탄탄한 정치안정속에 국력을 키우는 길이 더이상 그들이 우리를 얕보지 않도록할 뿐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2010-07-18 11:15:51
아나머임일본황당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