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절이 고스란히 내게로 왔다. 땅 끝 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의 얘기다.
수없이 그 절을 다녀왔지만 겉만 보고 왔었다. 하여 속살을 알지 못했는데 얼마 전 그 절의 주지인 금강스님에게서 책을 한권 받았다. 그리고 읽어 내려가는 내내 그 절이 따라왔다. 구중궁궐 같은 미황사가 드러나 있었다.
나의 미황사 길은 거의 정해진 길과 다름 아니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굴참나무와 동백림 사이의 길을 따라 올라서면 푸르딩딩한 보춘화와 등불처럼 환한 동백꽃이 드러난다.
그 꽃들 구경하며 오르면 자하루가 드러난다. 대웅보전을 마주보며 한편으로는 남해 바다를 관조하는 자하루는 지어진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마치 예전부터 있었던 듯 정겹게 나를 맞이한다.
사천왕문이나 금강문이 생략된 대신 자하루 누대 아래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정제되는 듯하다. 자하루 누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먼저 달마산의 영봉이 나를 내려 본다.
팔부신중 같기도 하고 불전의 후불탱화 같은 모습으로 맞이하는 그 산은 또 하나의 수호신 역할을 해준다. 절집 마당에 서면 이제는 달마산이 기암절경의 병풍이 되고 대웅보전은 그 안에 깃들여 사는 누옥이 된다.
대웅보전 앞 당간지주를 보면 이 집에 괘불이 모셔져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불법의 세계로 중생을 구제하는 대웅보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다시 지었고, 영조 때 다시 수리하였다.
절 내부에는 수많은 나한들이 불상을 옹위하고 있다. 자그마치 천분이 시위하고 있으니 그 곳에서 삼배를 올리면 도합 삼천배다. 당연히 그간의 강녕함을 묻고 나의 안녕을 묻는 삼배를 올리는 것이 순서다.
그 다음 향하는 곳은 응진당이다. 열여섯 분의 나한을 모신 이곳은 옛 선조들의 순정한 먹 선이 주는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던 곳이다.
그리고 법당을 내려선 다음 주지스님의 선방을 지나쳐 달마산정으로 향한 길을 찾는다. 운이 좋아 주지 스님을 만나면 차와 담소는 필수코스이지만 간혹 두려울 때도 있다.
속세에 있는 거사는 그 다음 해야 할 것과 행선지가 쭈욱 짜여져 있는데 스님은 그런 내 스케줄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피해가지만 바쁠 때 일수록 스님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서 옷고름이 잡히면 그때부터는 나의 스케줄은 없다. 이런 저런 저간의 일들을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은 금세 땅 끝에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땅 끝의 순례자에게 무한한 축복이다. 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내가 탈속을 한 것 같은 느낌으로 일체가 된다. 그런 스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숲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부도전으로 간다. 미황사를 아름답게 빛냈던 스님들의 자취가 부도전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분들 뵙고 산정에 가지 않는다면 이제 차례대로 내려오는 길이 내가 미황사를 다녀가는 길 차림이다.
한데 스님이 쓰신 책 안에는 자하루나 응진당, 요사채 등의 보수 및 건립 내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절집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특징이나 예전의 유구 등을 토대로 하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적격한 곳에 알맞은 건물을 배치하는 방식은 그 안에서 살아보지 않고는 도저히 부릴 수 없는 조화였는데 다름 아닌 이전 주지스님이 그곳에 계시면서 이룬 불적이라 하고 있었다.
무릇 많은 사찰들이 사찰의 규모를 키워나가며 세를 과시하고 불력을 모으려 할 때 미황사는 달마산의 지기와 산세, 사찰의 역사를 속속 알고 있는 스님들이 과욕을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불사를 하고 있음이 보인 것이다.
그 한편으로 금강스님은 속세간에서 찾아오는 중생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근심을 보살피고 어루만져 주면서 미황사의 휴먼 네트워크를 세상 속으로 확장을 하고 계시는 것이 기술되어 있었다.
법인스님과 함께 학문학당을 만들어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친근한 벗으로서의 역할을 찾아내는 과정, 참사람의 향기라는 템플스테이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 마을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안의 절집이고 마을사람들의 절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과정, 괘불재를 지내는 내력, ‘ 별이랑 달이랑 ’ 음악회가 갖는 의미 등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미황사의 내밀한 곳들을 보여주고 있는 그 책을 통해 나는 미황사에 다시 가고 싶은 욕망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바쁜 일상은 나를 회상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미황사 그 속살을 다시 찬찬히 바라보고 싶다. 이 겨울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