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절과 심역(1)
소강절과 심역(1)
  •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 승인 2016.04.2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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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북송대의 소옹(邵雍, 1011-1077)은 호가 요부(堯夫)인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요임금의 남자’라는 뜻에서 스스로 지은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신화시대를 지나고 인치(人治)의 시작이 요임금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박근혜의 남자’라느니, ‘왕의 남자’라느니 하지 않는가? 아님 요임금의 벗이란 뜻일지도.

그의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그는 38세부터 낙양의 이천에서 살았다. 장재(張載), 이정(二程 : 程顥, 程頤), 사마광(司馬光) 등과 이웃하고 교류하며 살았다. 그는 거처를 ‘편안히 즐기는 움막’이라는 뜻에서 안락와(安樂窩)라 이름 하였고, 스스로 안락선생이라 하였다. 때에 따라 밭 갈고 씨 뿌려 농사를 지어서 겨우 의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으며 45세에 이르러 제자들의 권유로 결혼하였고 47세에 아들 백온(伯溫)을 낳았다. 자치통감을 편찬하고 보한림학사의 지위에 이른 사마광은 소강절보다 8살 아래인데 서로 호형호제하였고, 그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하였다. 봄이면 함께 나들이를 가곤 하였는데, 소옹은 작은 마차를 타고 다녔다. 소옹의 마차가 미처 도착하지 않으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사마광의 소옹에 대한 이런 시가 있다. 「높은 덕을 가진 이 오래 기다려도 오지 않네」라는 시에서 “숲속 높은 집 바라보기 이미 오래, 꽃길 너머 작은 수레 아직도 오지 않네(林端高閣望已久 花外小車猶未來)”라는 시이다.

소옹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학의 대가이며 수학자였다. 그는 수(數)로써 만사 만물을 밝힌 대학자였으며, 그 학문이 계승되지 않아 오늘날 그의 학문이 올바르게 평가되지 않음은 안타까울 뿐이다. 소위 역학이 상수역과 의리역으로 나뉘는데 상수역에서도 상역(象易)과 수역(數易)으로 나뉘기도 하며 소옹은 수역자에 가깝다.

정확히는 심역(心易)이라 하여 말글이 생기기 이전의 역, 즉 선천역으로 복희가 괘를 그린 획괘(劃卦)의 본 뜻을 깨달은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청말 민국 초에 민주화 운동가로 유명한 역학자 항신재(杭辛齋)는 “수로 말미암아 마음이 생긴다數由生心)”고 하였다. 정확한 말이고 여기에 주역의 참진리와 더불어 인생의 철학이 다 들어 있다. 천하만사는 수이다. “재수가 있다, 없다”, “운수가 있다, 없다”, “아홉수를 조심하라” 등이 이에 해당하는 말이다.

당송팔대가 중 한사람인 송대의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소강절보다 4살 위인데 한림원 학사를 지낸 이로 소옹을 만난 적이 없는데도 그를 황제에게 천거하였다. 소옹은 황제의 부름(詔命)이 세 번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구양수는 아들 비(歐陽棐)가 일이 있어 낙양에 가게 되자 아들에게 “낙양에는 소요부가 있는데, 나는 유독 그를 알지 못한다. 너는 나를 위해 그를 만나 뵙도록 하여라”고 하였고, 비는 소옹을 만났다. 소옹은 비에게 자신의 이력을 소상히 알려 준다.

비와 이별할 때 “그대는 이 말을 잊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어린 비는 소옹의 ‘잊지 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20년 후 비는 태상(太常)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고 소옹의 시호에 관한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비는 소옹이 부탁한 것이 여기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옹은 구양비의 앞날과 함께 20년 후에 있을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위 북송오자(北宋五子 :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중 가장 연장자인데 다른 유가들과는 같지 않았다. 스스로 유학자임을 밝히기도 하였으며 유가의 법도를 지키되 유가들이 고수하는 명분이라든지 예법의 구속에는 초연하였고, 엄격함도 싫어했으며 도가의 정신도 함께 하였으나 도가적 방임은 따르지 않았다.

엄격한 유가의 관점에서 보면 도가에 가깝고,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도인이었다. 물론 불교에 대한 식견 또한 깊었으며 오직 천명이라는 경지에 다다른 위인이었다. 이정 중에 형인 명도선생이 이천보다는 성정이 호방하였는데 명도는 소옹을 평하기를 “요부는 흉중에 자유로움과 광활함을 함께 품었으니, 마치 공중의 누각과 같이 사방팔방으로 두루 통하였다”고 하였다.

소옹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후학들은 그의 역학을 단순한 술가(術家)로 점(算命學)에 뛰어난 사람정도로 평가하는데, 그의 학문은 그런 수준과는 차원을 달리한 대학자였다. 현대 중국의 대학자 고회민은 소옹의 역학연구의 경지를 “64괘 괘사를 지은 문왕과 공자-역의 완성은 3성인 즉 복희, 문왕, 공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함-이후로 비견할 사람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주 문·무왕 시대에 이르러 역학이 천도사상에서 인도사상으로 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점을 통해 인간의 삶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자에 이르러 철학사상을 겸하면서 유가와 도가로 나뉘는 중국철학의 시원이요 군경지수(群經之首)의 지위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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