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8세에 중국 안징, 우한에서 6년간 ‘위안부’ 생활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강제로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전후에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힘겨운 생활을 했던 수많은 일본군 ‘위안부’ 중에서 순천 출신 ‘백넙데기’ 할머니가 계신다.
백넙데기 할머니는 1922년 순천시 승주군 세평리 소작농 집에서 6남매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1927년 8세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로 들어갔고 혼례는 치르지 않았다. 남편은 그를 술집에 팔았고 이후 또다시 중국으로 팔려갔다.
1939년 18세의 나이로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중국 한구에 도착해 일본군을 상대하기 시작 후 6년간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하루는 일본군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일본 주인이 들어와 칼로 왼쪽 검지를 칼로 잘라버렸다.
중국의 옌벤(延辺)에서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만날 수 있었지만, 내륙 깊숙한 후베이(湖北) 성우한(武汉) 위안소까지 피해자가 남아 있을 거라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백넙데기 할머니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황피(篁陂)의 작은 마을에서였다.
할머니는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우한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교류가 없어 간단한 조선말조차 잊은지 오래였다.
일본인 '위안부' 하상숙씨를 통해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눴지만 황피(篁陂) 특유의 사투리가 심해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해 묻자 짧게 “세평리”라고 답을 해 전남 승주군 세평리를 찾을 수 있었고 호적을 찾아봤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또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관해 묻자 “听不懂(팅부동), 왜 자꾸 같은 말을 물어?”라며 화를 냈다.
백넙데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도망가는 일본군을 통해 알았고, 다른 여자들과 함께 남아 있는 돈을 모아 배를 타고 양쯔강을 따라 한커우(汉口)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피붙이 하나 없이 혼자 지내다가 두번째 남편을 만나 그곳에 남아 살 수 밖에 없었다.
나이, 생년 등을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보여 달라 했지만 "신분증은 따로 없다"며 낡고 작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수첩 겉면에는 외국인 거류증이라고 쓰여 있고 안쪽에는 할머니 사진과 5년마다 공안의 확인 도장이 찍혀있었다.
이름도 백넵데기가 아닌 이잉란(易英兰)의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50여 년의 세월 동안 일본, 한국, 북한, 중국 등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백넙데기 할머니는 꽃다운 청춘을 짓밟힌 채 살다가 백발이 되어 1999년에 국적회복 판정을 받아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하상숙 할머니와 지내다가 지난 2008년도에 생을 마감했다.
특히, 현재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는 총 9명이다. ‘위안부’에 작은 따옴표를 표시하는 이유는 범죄를 축소하는 완곡한 표현이지만 그 역사적 실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과 이것이 역사적인 용어라는 바를 밝히기 위해 작은 따옴표를 붙여 표기한다.
한편, 순천평화나비에서 주최한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 기념식인 평화나비 문화제가 오는 24일 순천조례호수공원 원형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