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 박정희라는 화두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그가 생(生)을 놓은 지 사반세기가
훌쩍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답답한 현실의 이면에는 어떤 원인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는 열여덟 해 동안 한 나라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다는, 한국현대사에서의 그의 위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상식의 길(道)’이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시원스레 뚫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자꾸만 박정희라는 망령을 그의 묘비명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 개봉되었던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은, 이 답답한 비(非)상식의 사회를 대면케 하는 거울이라 할만 했다. 한 인물의 명예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한 편의 영화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한 법원의 그 문제적 판결! 고매하신(?) 그 분들의 인권 보호 노력이 눈물겨워야 할 판인데, 그 어수선한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 풍경만큼이나 어수선할 따름이다.
그 분들이 그토록 각별히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이, 한국현대사의 갈피에 무수한 인권 유린의 상흔을 남겨놓았던걸 상기해 보면 말이다.
그가 ‘왕’으로 군림했던 그 때 그 시절, 대한민국 공화국의 시민들은 ‘박정희 체제’라는(자유민주주의 혹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으로
치장된…) 특수한 시공간에서 아주 ‘숨막히게’ 살았을 따름이다. 자유민주주의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언어들은, 다만 그럴 듯하게 꾸며진 독재의
가면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억압적이었던 유사 왕권 체제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올해는
‘인혁당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들이, 정말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0년이 되는 해다. 30년이라는 세월이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세월은 그리 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의 가족이 감내해야 했을 그 오랜
시간들은 지옥과 같은 것이었을 테니까. 또한, 오늘날까지 그 어두웠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으로 해서,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감각으로
살아있는 악몽의 연속이었을 테니까. 허나 몇 십 주년으로 기억되는 그 때의 상처들이 어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몫 뿐이겠는가. 십진법의 주기로
기억되는 그 때 그 시절의 수많은 비극들은 매해 각자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 만큼, 박정희 체제의 역사는, 인권 유린의 역사였고 또한
폭압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 숨이 막힐 듯한 순간들을 야릇한 향수(鄕愁)로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정신구조를, 우리들은(적어도 ‘상식’의 힘을
믿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순간이면, 10여 년 전 정치영화의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가 총연출을 맡았던 옴니버스 인권 영화
<잊지 말자>가 떠오른다. ‘24’인지 아니면 ‘27’인지 명쾌한 숫자 감각으로 떠올릴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엇비슷한 숫자의
국가를 대상으로 삼아 그 나라의 인권 유린 실태를 각 나라 당 10분 내외로 보여준 작품이 바로 <잊지 말자>라는 영화였다. 의식
있는 사회파 감독들이 대거 참여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에 빠져들고 말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인권에 대한 예리한 의식이
흐릿해지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억압의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의 기본적인 권리를 내리 누를 태세를 갖추기 마련이다. [잊지 말자]라는
영화는, 어쩌면 그런 암울한 상황을 경계하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에 다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쁜 것은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하자는
미덕은, 적어도 우리가 지나온 역사적 상흔의 질곡에까지 적용되어서는 안 될 그 무엇이다. 경제적 풍요라는 수사(修辭)에 취해, 독재의 기억을
망각의 저편으로 쉽사리 넘겨버리는 미덕(?)은 과연 떳떳한 것일까? 내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러한 현상은, 다만 부끄러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휘현 자유기고가nosh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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