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돌을 맞은 제헌절.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뜨겁다. 국회의장 자문기구인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이달 말 헌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고, 집권여당은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개헌을 끝내겠다고 한다.
하지만 주권자인 국민들은 시큰둥하다. 헌법을 고쳐야 할 필요성도, 무엇을 개정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정치권에서의 논의도 주로 권력구조 개편에 관한 것이어서 국민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다.
최재천 전 민주당(서울 성동갑)의원에게 현 개헌논의의 적정성에 대해 물었다. 최 전 의원은 ‘헌법전’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개헌이 아닌 헌법 실천을 강조했다. 인터뷰는 그가 대표 변호사로 있는 서울 ‘법무법인 한강’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활발하다.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하는가.
왜 개헌이 필요한가. 현재 개헌 논의는 대단히 의도가 불순하다. 정책·정치·정부 실패를 헌법 실패로 호도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개헌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려 한다.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 1987년 현행헌법 개정 때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과거 쿠데타 세력들은 자의적으로 헌법을 만들어 취약한 통치기반을 합리화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헌법제정권력자·헌법개정권력자이자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입각한 민주정부를 직접 구성해야 한다는 전 국민적 열망이 있었다.
‘대통령을 내손으로’라는 당시 모토는 그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듯 개헌은 전 국민적인 동의하에 이뤄져야하는데 현 논의는 정치권에서만 이야기될 뿐 국민들은 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국민을 설득할 수 없는 즉, 동력 없는 개헌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속칭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헌법이 한계에 부딪혀 개헌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해 국민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의사가 결집된 상태에서 나중에 정치권이 움직이는 방식이어야 한다.
▲ 개헌의 핵심이 대통령 단임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왜 5년 대통령 단임제가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 불안이 이유라고 하지만 미국대통령 평균재임기간이 6년 이하임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없다. 문제는 단임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남용이다.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jr.)가 표현한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제로 흐르는 것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 모든 것을 위임받았다고 착각하고, 대통령직을 입신양명의 정점으로 생각하는 ‘사적민주주의’의 발상에서 기인한다.
공적인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대통령이 지극히 사적으로 모든 권력을 행사하는 상태에서 권력이 독점되다 보니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성립되지 않고 삼권 중 행정부가 지나치게 우위를 점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국민주권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이런 상태에서 단임제가 개정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 주된 개헌 논의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개헌논의는 크게 두 가지지만 모두 시대적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다. 먼저 권력구조를 개편하자는 주장이다. 현실정치의 한계를 개헌이란 수단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대개 집권여당에서 나온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집중되고 논의가 바로 실정에 대한 정치적 돌파수단으로써의 개헌이다.
다른 하나는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류의 자유주의론자들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우리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가의 개입과 조정을 모두 철폐하자고 말한다.
경제적 자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약자보호, 자유권과 공공성의 조화, 국가의 주택공급의무, 지역분권, 농어민·중소기업 보호 등을 모두 규제로 본다. 이기적인 시장주의자들이 움직일 때 경제는 잘 돌아가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일체의 자유·무규제, ‘가장 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완벽한 자유주의적 헌법을 꿈꾸고 있다.
이는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불러와 시장우위에서 국가·정치 우위로 돌아서고,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내지는 중간정부로 가고 있는 세계적인 흐름에는 역행하는 것이다. 미국조차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유럽에서는 은행을 국유화하며 국가의 조정과 개입이 전면화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헌법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위기를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IMF 위기 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최근 만난 미국의 저명한 법률가도 국가의 경제에 대한 조정과 개입을 규정하고 있는 우리나라 헌법§119조②에 대해 ‘아름다운 조항’(beautiful clause)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진보진영에서의 개헌논의는 없나.
진보진영 쪽에서의 개헌 논의는 아직은 약한 편이다. 오히려 현행헌법을 제대로 실천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개인의 사적 자치와 공공성의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헌법의 이념들을 잘 이행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87년 헌법은 최신의 것이고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은 없다. 우리 헌법은 민주화 등 급박한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전면 개정한 최근의 것이고, 세계의 어떤 헌법보다도 좋은 규정들이 많다. 문제는 현실에서 지켜지지 않는 헌법의 실천이다.
지방자치·지역균형발전이 헌법에 명시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서울 1극 중심주의다. 대통령에로의 권력집중을 방지하도록 책임총리제를 규정하고 권력분산을 규정했지만 유명무실하다. 재산권의 행사도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제한했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소유권 특히 토지소유권 절대주의 나라다. 18세기 개념이 지배하고 있다.
가장 큰 사회문제인 주택과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주책개발정책 등을 통해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주택공급율 110%인 상태에서 자가주택보급율은 12년째 54%에 머물고 있다. 모든 국민이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도록 했음에도 현실은 그런가. 부모님의 경제력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서 교육이 차별화되고 있다. 이외에도 부지기수로 헌법 위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키지 않으면서 헌법 탓 만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것을 권력·정치 구조 탓으로 돌리지 말고 주권자의 의사 즉, 헌법의 의사에 충실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헌법을 지키지 않고, 주권자의 의사에 반해 가진 자·대기업·재벌·토지소유권자 중심의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 현 정부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권자의 의사로 돌아가라는 것이 진보진영의 가장 큰 요구여야 한다.
▲ 헌법에서 개정해야할 규정은 없는가.
개정보다는 헌법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헌법변천’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정희 시대 산물인 헌법§29조② 국가배상제도를 예로 들자면 이 규정은 나라를 위해서 공무를 수행하던 중 상해를 입은 군인·경찰 등에게 국가배상을 제한하는 규정이다.
하지만 헌법을 우회해 배상이 될 수 있도록 규정돼있다. 헌법에서는 제한한 것을 그 하위 법률인 국가배상법에서 폭을 넓혀놓은 것이다. 국회 법사위 시절 위헌논쟁을 무릅쓰고 권리의 폭을 넓혔다. 청문회도 비슷하다. 국회동의만 받으면 되는 조항을 확대해석해 법률에는 중요 직책에 대해서 국회 청문회를 거치도록 했다. 대통령의 공무원임명권에 대한 침해의 소지도 있지만 주권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방안이기에 다들 이의제기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 정도까지는 용납될 수 있다. 이를 국회가 받아들이고 헌법재판소가 인정해주면 된다. 모든 것을 개헌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은 아파트가 낡았다고 무조건 새로 짓는 ‘토건국가’적 발상이다.
▲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듯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많은데.
우리 법체계상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취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자체장에 대한 주민소환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재 주권자와 주권자의 의사를 위임받은 대표 사이에 모순과 불일치가 상당하다. 이를 해소하는 방편의 하나로 일종의 ‘중간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시절 각종 위원회 제도를 통해서 이를 일부 실험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민단체들을 고사시키며, 시민 아니면 대표라는 지나치게 이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시장경제가 돌아가고 4년에 한번 투표하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앙상한 민주주의’(thin demacracy)다.
무엇보다 공론이 중요하다. 특정 주제를 향해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고 형성시켜나가는 공론을 활성화해야 한다. 대선을 통해 대운하를 위임받았다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공론의 장으로 가져가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고, 정치권은 거기에 반응해줘야 한다. ‘신영철 물러가라, 쇠고기 재협상하라’면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권력은 위임받은 독재에 불과한 것이다.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사법부 등은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도 문제다. 삼권 간에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권한이 집중됐을 때 견제할 수단도 없다. 상시 감시기구처럼 상시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국가적 시스템이 보장돼야 한다. 공론의 장을 통해 주권자의 의사를 정치권이 언제든지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죽어있는 국민투표를 살리는 것도 대안이다. 한미 FTA·사교육·대입제도 등 중요정책은 국민투표를 통해 의사를 묻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헌법에서 규정한 국민투표를 실행할 수 있는 국민투표법이 없는 현실이다. 명백한 입법방기다. 스위스의 경우 국민투표를 통해 결국 미국과의 FTA를 취소한 사례가 있다.
▲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법치’에 대해 평가한다면.
현 집권세력들은 대단히 위험한 법을 생각하고 있다. 지나치게 국가안전보장과 질서유지 등 질서법에 매몰돼 있다. 이는 전근대적인 경찰국가시대 법치 개념이다. 미네르바 구속에서 볼 수 있듯이 질서·국가안전보장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선거 외에도 상시적으로 주권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표현의 자유’고 이는 헌법상의 권리다. 하지만 하위법률이 헌법을 뛰어넘는 사태를 우리가 목격한 것이다. 진정한 법치는 ‘헌법치’(헌치)다. 주권자가 만들어놓은 헌법에 따라 해석하고 통치하는 것이지 현 정부처럼 법률로 헌법을 제한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헌법파괴행위다.
▲ 다시 진보진영에게 기회가 올까.
지난 17대 국회는 처음으로 준 진보진영이 행정·입법부를 맡았는데 그 기회를 활용 못했다. 전적으로 가치와 비전 결여 즉, 헌법이념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다시 기회가 올수도 있겠지만 만약 오더라도 현재로서는 지극히 반사적 이득이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 가치·비전 측면에서 대안을 만들고 정책·세력 대안도 만들어야 한다. 막연히 반 한나라당·반 MB만으로 기회가 올 것이라는 안일한 발상을 버려야 한다. 이는 현 집권세력이 꿈꾸는 일본 55년 체제와 같은 장기집권을 공고히 해주는 역사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 최재천 전 의원은 헌법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재직하던 지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했다. 법사위에서 간사, 정보위원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현재는 ‘법무법인 한강’의 대표변호사로 있다. 참여정부에서 ‘4대개혁입법’ 추진을 주도했고, 여당 의원이었지만 국민주권 등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소신 있게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방대한 독서를 바탕으로 ‘100분 토론’ 등 각종 토론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촌철살인의 논객으로도 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