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는 춥고 바람도 차다. 영하의 날씨가 연일 계속된다. 찬 날씨에 잠시 밖에 나갔다가 덜컥 감기에 걸렸다. 면역력이 약해졌다는 신호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감기를 다스리느라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집에 갇혀 하는 일이라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뿐이다.
또 몇 년째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뱅갈고무나무 두 그루와 산세비에리아 화분에 물을 주는 일도 한다. 그것들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 내가 물 주는 것을 깜빡 잊으면 잎사귀 한두 장이 노랗게 변해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은 물을 달라는 신호다. 내 집에 있는 것들은 무엇이건 내가 돌봐 주기를 바란다.
복동이도 그렇다. 동물미용실 주인은 복동이를 보더니 곧 무지개다리를 건널 것 같다며 마음의 정리를 하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났지만 우리는 복동이와 작별하는 순간까지 최대한 따뜻하게 보살펴 주기로 했다. 복동이의 식단에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추가하고, 특별한 간식을 준비해서 주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운 없이 움직이기 싫어하고 사료에 입을 대지 않던 복동이가 며칠 만에 다리에 힘이 생겼다. 혼자 지내다 보니 가끔 밥에 김치만 얹어 대충 한 끼 때울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매 끼니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
아내가 자주 찾아와 이것저것 집안일을 해주고 가지만, 나 혼자 살다시피 하고 있으므로 밥 한 끼 건사하느라 쌀을 안치고 미역국을 끓이고 양배추를 씻는다. 아내에게 부탁해서 사 온 석화를 소금을 약간 탄 물에 씻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익숙하지만, 설거지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싱크대에서 찬물로 설거지를 할 때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집안 청소도 해야 한다. 진공청소기로 바닥을 한 번 쓸고 나서 거실, 방, 화장실을 대걸레로 닦는다. 먼지와 머리카락이 묻어나온다.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도시는 먼지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혼자 사는 집도 청소하지 않으면 먼지가 거멓게 쌓인다. 호숫가 별장에도 먼지가 쌓이는 것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하루의 일상이 단조롭다고 할까. 나는 매양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이런 생활이 무척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생활에 불만이 없다. 내가 머무는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십 년도 더 전부터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 TV를 봐도 어두운 소식들뿐이니, 차라리 그 시간에 샤워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없이 살면 하루의 시간이 넉넉해진다.
그래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인생의 남은 여정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물론 소망한다고 해서 다 이룰 수는 없겠지만, 농부가 논에 몰꼬를 트듯이 나도 다가오는 날들을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 소매라도 걷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일이란 전라도 말로 "신간이 편해야제"라는 말처럼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한다. 문제는, 신간이 편하려면 건강과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이가 든 시니어들에게는 특히 절실한 문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설파하셨다.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무소유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두 차례나 시골 학교와 문화원에 책을 기증했지만, 여전히 방마다 책이 가득하다. 다 읽을 수도 없는 책인데, 내가 이것들을 처분해야 비로소 무소유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을 한다는 말처럼, 무엇이든 소유하고 있으면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집안에는 너무나 많은 잡다한 물건들이 있다. 죄다 돈을 주고 사 온 것들이다. 이제 와서 보니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에서야 그걸 깨달았다.
나도 한 사람의 생활인이라 가족, 지인, 모임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항상 소통하며 지내야 한다. 병원에 가는 일, 납세하는 일도 내 일이다. 방 안에 아무것도 없이 봉은사 장판방에 앉은뱅이 탁자 하나, 그 위에 책 한 권을 두고 방석에 앉아 계시던 법정 스님의 단아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속세에 있으니 죽어도 그렇게 살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나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