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들이 해외견문을 넓힌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해 어찌 보면 당연하고 권장할 사안이다.
실제로 대다수 공직자들은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고, 가슴 한켠에는 국가와 국민이 늘상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 의회를 포함한 공직자들의 해외연수 목적이 본질과 다르게 변질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에 각종 추태를 곁들이는 사건이 터질라치면 시민들의 마음은 참 불편하기만 하다. 이때 시민들은 참 ‘가지가지 한다’고 비아냥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다.
전문분야가 다르고, 근무방식이 제각각 다르다 보니 해외연수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 또한 다를 것임에도 한 깃발 아래 몰려다니는 모양새야 말로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닐 성 싶다.
그런 여행들은 대개 관광이 목적일 테고, 공익은 핑계고 뒷전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의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근대일본 메이지정부는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하여금 구미(歐美)시찰을 하도록 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후 근대일본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비전을 보게 된다.바로 정글의 법칙과 유사한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근대서구의 국제질서임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이후 근대일본은 국가비전을 바꾸게 된다.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19세기의 국제정치패러다임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만다. 사절단의 통찰력은 근대일본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해외연수단이 근대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만큼의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공직자들은 연수국가나 도시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국가나 도시가 작동하는 메카니즘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익목적의 해외연수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자신이 속한 국가나 사회의 미래비전을 찾기 위해 적합한 도시를 물색하고 그에 합당한 연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자 스스로가 다양한 프레임이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직자들의 해외연수를 평가하는 공익적 기준과 조건은 무얼까?
첫째, 연수목적이 공익성을 띠어야 한다.
국제회의나 도시 간 교류, 정책연구, 학술연구 등의 합당한 목적이 존재해야 한다.
둘째, 해당도시와 수행과제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거나 적어도 연구모형이나 정책모형이 존재해야 한다.
학술연구 또는 정책연구 과제가 해당 국가나 도시를 방문해야 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셋째, 연구 및 정책보고서가 반드시 결과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세금으로 해외연수를 보내주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다.
앞으로 해외연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4차 산업혁명시대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질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이란 대체로 첨단 지능정보통신기술이 기존 산업 전반에 융합되거나 신기술과 결합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사물을 지능화해 초지능(superintelligence)과 초연결(hyperconnectivity)이 생명인 산업혁명을 의미하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세상이 크게,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 작금의 시대를 준비하는 국가나 사회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고, 준비하지 않는 국가나 사회에게는 위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4차 산업혁명시대를 온전히 준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진국가나 선진도시의 사례를 해외연수를 통해 꼼꼼하게 살피거나 받아들이는 이유도 그래서다.
시찰 결과는 보고서 등으로 작성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고 바람직하다.
뛰어난 능력과 안목을 가진 현재의 공직자들은 적어도 근대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 보다는 좀 더 세련되고, 과학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해외여행 역시 합목적성을 가져야 한다. 아니 좀 더 생산적이라는 말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런데 훌륭한 선진 해외문물을 보고 느끼며 배우는 연수다운 연수는 실제로는 청년들이 더 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나 도시의 미래를 청년에게 맡기고 싶거든 공직자 대신에 청년들에게 해외연수를 다녀오도록 하면 어떠냐고 묻고 싶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데, 우리의 청년들이 선제적으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선진문물을 알고 배워서 현실에 적응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해외연수를 간답시고 그곳에서 눈살을 찌푸린 행동을 하거나, 건성건성 여행목적으로 다녀오는 지방의원이나 지자체 공무원들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장래 4차 산업혁명시대를 온 몸으로 겪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사실 청년이기에 그렇다.
만약 하나 앞서 제시했던 해외연수가 공익적 기준과 조건에 부합하지 않거나 적어도 근대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 보다 더 훌륭한 비전을 제시할 자신이 없다면, 책정된 해외연수 경비를 이참에 ‘차라리 청년에게 되돌려 주라’고 외쳐대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