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2) - 갑신정변과 민영익
조선, 부패로 망하다 (42) - 갑신정변과 민영익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9.0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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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0월 17일에 김옥균, 박영교·박영효 형제, 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20~30대의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갑신정변(甲申政變)이었다.

우정총국 (서울 종로 조계사 옆)
우정총국 (서울 종로 조계사 옆)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수구파를 척살하고 근대적 자주 국가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1884년 10월 17일 밤 7시, 서울 견지동 우정총국에선 낙성식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총판(總辦) 홍영식이 주관한 연회에는 미국 공사, 영국 공사,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 외교 고문, 청국 영사,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민영익·민병석·김홍집 등이 참석했고,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는 물론 윤치호도 통역 자격으로 참석했다.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사대 수구파 인사들을 척살하고 곧바로 궁궐로 들어가기로 했다.

밤 10시경에 바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고 밖으로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여러 군데 칼에 찔린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져 사경(死境)을 헤맸다.

이 날 밤늦게 김옥균 등 개화파는 곧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정변을 알렸다. 이들은 우선 고종와 민왕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긴 다음 왕명을 위조하여 민씨척족과 수구파 거물들을 불렀다. 18일 새벽에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등이 입궁했다가 처단되었다.

우정총국 안내판
우정총국 안내판

이들이 처단되자 위험을 느낀 민왕후는 기지를 발휘했다. 18일 아침에 심상훈이 개화파 지지자로 위장하여 왕후를 알현했다. 왕후는 심상훈을 통해 바깥의 민영환과 연락을 했고, 고종 부부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환궁하겠다고 주장했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단호히 거절했지만,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여 고종 부부는 18일 오후 5시에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10월 19일 오후 3시에 원세개가 이끄는 1,500명의 청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공격하여 들어왔다. 그런데 일본군은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고종을 호위한 홍영식·박영교는 청군에게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에서 시작하여 10월 19일(양력 12월 6일)에 끝났다. ‘3일 천하’였다.

한편 사경(死境)을 헤매는 민영익은 어찌 되었을까? 아수라장이 된 우정국 낙성식 연회장에서 묄렌도르프가 간신히 그를 구해 자기 집으로 옮겼다.

달려온 어의(한의사)들이 칼에 찔린 민영익을 치료하지 못해 당황하자, 묄렌도르프는 미국 공사관 소속의 선교사 겸 의사 알렌(1858∽1932)을 불렀다. 알렌은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1881년 웨즐리언 대학 신학과,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송되었다. 그는 1884년 9월에 서울에 왔는데 미국 공사관 무급의사를 하고 있었다.

알렌은 지혈과 봉합 수술 등 서양 외과술로 민영익을 간신히 살려냈다. 이러자 민왕후가 가장 기뻐했다. 민왕후는 조카를 살린 알렌에게 감사의 뜻으로 10만 냥을 하사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50억 원이었다. 참으로 통 큰 민왕후였다.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역사저널 그날 8 순조에서 순종까지, 민음사, 2017, p 95-98 )

한편 민영익을 살려준 알렌은 고종의 어의(御醫)가 된다. 이러자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고종에게 제안했고, 이에 고종은 조선 백성 치료 기관이었던 혜민서와 활인서를 없애는 대신 광혜원(廣惠院) 설립을 허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은 1885년 2월 29일에 설립되었는데 고종은 개원 13일 이후인 3월 12일에 제중원(濟衆院 널리 민중을 구제하는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친필을 하사했다.

제중원 건물은 고종이 하사한 서울시 중구 재동에 있는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이었다. 홍영식은 10월 19일에 북묘까지 고종을 수행했다가 청나라 부대에 난자당해 죽었다.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전 영의정)도 손자, 며느리와 함께 약을 먹고 자살했다.

알렌이 이 집에 도착하니 피가 아직도 낭자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고, 헌법재판소라니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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