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8일의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해전이다. 이 해전은 일본 측 연구자의 표현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에 대한 사망 선고가 내려진 해전”이었다.
그러면 한산대첩에 대하여 살펴보자.
6월 10일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영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는 전라관찰사 이광의 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서장은 6월 3일에 수원에서 발송되어 10일 접수하였는데 내용은 이렇다.
“5월 22일 작성된 좌부승지의 서장 안에 ‘경상우수사와 함께 상의하여 왜선을 남김없이 격파하라. 전라우수사에게는 병선을 정비하여 계속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는 조정의 지시가 있으니 서장의 내용을 상고하여 경상우수사 및 전라우수사와 함께 약속하고 전례에 따라 시행함이 좋을 것이다.”
6월 11일에 선조가 평양을 빠져나가 의주로 향하고 14일에 고니시가 평양성을 점령했다. 이 때 고니시는 선조를 위협하는 편지를 보냈다.
“수군 10만 여명이 또 서해로부터 오고 있는데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이요?”(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161)
6월 14일에 이순신은 조정에 보낼 장계 2통을 썼다. 하나는 조정에 보낼 장계, 또 하나는 군관에게 길에 던져 놓도록 한 거짓 장계로 일본군이 주워서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짓 장계는 조카 이분이 지은 ‘이순신 행록 1592년 6월 14일’에 나온다.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비봉출판사, 2006, p 329-330)
“신은 이제 전선 수만 척을 이끌고 비장군(飛將軍) 모(某)를 선봉으로 삼아 곧바로 일본을 치기 위해 모월 모일에 출발하려 하나이다.”
옥포·합포 ·적진포 ·사천·당포·당항포·율포의 7번의 해전에서 연승한 이순신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전쟁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재출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와 수리를 감독하고, 군병 출납을 담당하는 군관)인 나대용도 다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선 정비과 병력 확충에 매진했다.
한편 일곱 번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연거푸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노했다.
그는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참모들에게 승전한 조선 장수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6월 23일에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에게 편지를 보내 용인 전투의 승리를 칭찬함과 동시에 조선 수군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지난 7일과 19일의 편지는 오늘(23일) 오후 6시에 받아보았다. 김해 강구의 적 함대를 치기 위해서 서울로부터 내려왔다니 잘한 일이다. 구키, 가토 두 사람을 합쳐 세 사람이 의논하여 실수 없이 행동하되 시급히 적을 섬멸하라 ... ”(김성한, 7년 전쟁 3, p 189)
이를 보면 와키자카는 6월 6일 용인전투에 승리한 즉시 히데요시에게 편지를 보냈고, 6월 14일에 부산포에 도착하여 또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7월 들어 이순신은 왜군이 수륙합동으로 전라도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 육군이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남 금산군)까지 진출했고, 바다에서도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도 해역을 넘보는 일본 수군을 치려고 3차 출전을 결심한다. 7월 4일에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전라좌수영에 도착했다. 5일에는 전라좌우수군 합동작전을 논의하고, 6일 새벽에 전라좌우도 연합함대는 출전하여 남해의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했다. 원균은 파손된 배를 수리하여 전선 7척을 거느리고 왔다.
당시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총 58척이었는데 거북선도 두 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라좌수군 판옥선 24척과 거북선 2척, 전라우수군 25척, 경상우수군 7척)
조선 연합 함대는 진주 땅 창신도(昌新島 남해군 창선면 창선도)에 정박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7일에는 강풍으로 항해가 어려운 가운데 고성땅 당포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어 야영준비를 하며 나무하고 물긷는 일을 하고 있을 때, 피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미륵도)의 목동(왕실 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사람) 김천손이 조선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 말했다.
"왜선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머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