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12일 오전 10시쯤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도착했다. 한산도에는 지난 8일 한산 해전에서 목숨을 건진 왜군들이 연일 굶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한 채 해변에서 졸고 있었는데,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 3급을 베었고, 나머지 왜군들은 새장 속의 새같이 갇혀 있었다.
그런데 전라도 좌우수군은 군량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금산의 적세가 크게 번성하여 이미 전주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이 연달아 도착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는 왜군은 거제도의 군사와 그 백성들이 힘을 합쳐 목을 베고 그 수급을 통고하도록 경상우수사 원균과 약속하고 13일에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선이 많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서 한산도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는 바람에 한산도에 상륙한 왜군들은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탈출하였다. 이순신은 9월 10일에 조정에 올린 장계 ‘포위되었던 왜병이 도망친 일을 아뢰는 계본’에서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 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였다고 적었다.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80)
한편 68세의 일본 수군 도노오카 진자에몬은 1592년 7월 28일에 부산포에서 기술한 ‘고려선 전기(高麗船戰記)’(최관·김시덕 공저,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 p 217)에서 ‘안골포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와키자카 님의 전투 소식을 들으신 구키 요시타카님과 가토 요시아키 님은 부산포에서 출발하여 가덕도를 지나 안골포 항에 들어갔다. 10일 오전 8시경부터 적의 큰 배 58척, 작은 배 50척 가량이 공격하여 왔다.
큰 배 가운데 3척은 메꾸라부네(盲船,장님배,거북선을 말함)로, 쇠로 방어를 하고 (쇠로 되어 있는 요해 要害) 대포·불화살·끝이 둘로 갈라진 화살 등을 쏘았다. 오전 8시경부터 오후 9시경까지 번갈아 공격하여 아군 배의 고루(고루)며 통로며 발을 보호하여 주는 방어 시설까지 모두 부수었다.
그 대포는 15척(약 150cm) 길이의 단단한 나무 끝을 철로 두르고 철로 된 날개도 삼면에 붙이고, 적으로 향하는 끝 쪽에는 폭이 1척 2-3촌(약 36cm)되는 끝이 둘로 갈라진 화살을 붙인 무기이다.
불화살은 끝에 철을 둥글고 튼튼하게 붙인 것이다. 이런 화살을 3~5간(間 약 6~10m) 거리까지 다가와 쏘았다.
구키님은 니혼마루 배의 고루에서 조총을 쏘셨는데, 적이 쏜 대포를 한 발도 맞지 않았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 구키 요시타카의 기슈쿠 배가 가토 요시아키의 큰 배와 마주하고 작은 배들이 그 사이에 위치하여 조총을 쏘았다. 기슈쿠 배와 가토 요시아키의 큰 배에서 대포를 쏘아대니 적군은 부상자 ·전사자가 다수 발생하여 섬들로 후퇴하였다. 기슈쿠 베에서도 부상자 ·전사자가 다수 발생하였기 때문에 부산포로 후퇴하였다.
(중략) 지쿠젠 나고야 본진에 계신 다이코 히데요시 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구키 요시타카에게 주인장을 보내어, 도도 다카토라님·간 미치나가 님과 협력하여 육해군은 배의 척 수에 따라 지시대로 당책산(唐冊山)에 성을 쌓아 그곳에서 싸울 것이며, 경솔히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다.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p 317-319)
그러면 1592년 7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이순신이 왜병을 고성 견내량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때에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으로 향하자 이순신이 이억기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陳)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이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계(資階)를 상으로 내리고 하서(下書)하여 칭찬하였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