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9월 16일의 명량대첩은 왜군의 서해진출을 무산시켰다.
이날 밤 이순신은 당사도(무안군 암태도)에 머물렀다. 조선 전함은 한 척도 부서지지 않았지만 왜군과 더 싸우기는 어려웠다.
17일에 이순신은 어외도(신안군 지도읍 지도)에 이르렀다. 이때 300여 척의 피난선이 먼저 와 있었다.
나주 진사 임선, 임환(백호 임제의 동생), 임업 등이 방문하여 승첩을 축하하고 식량을 많이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외도에서 하루 더 머무른 조선 함대는 9월 19일에 영광 칠산도 바다를 건너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렀다. 이때 흉악한 왜적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의 집과 창고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순신은 해질 무렵 홍농 앞바다에 당도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20일에 이순신은 다시 서해로 북상하여 위도(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이르렀다. 이곳에도 피난선이 많이 정박하고 있었다.
21일에 이순신은 서해로 올라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고군산도에서 10월 2일까지 12일간 머물렀다.
그러면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일본 수군의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왜군은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무안, 함평, 영광 앞바다를 다니면서 정찰을 계속하며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9월 22일에 일본 수군은 무안에서 군자첨정 정기수를 사로잡았다.
23일에 도도 다카토라는 형조좌랑 강항을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붙잡았다.
일본에 끌려간 강항은 1600년 5월에 귀국하여 포로 생활의 기록 ‘간양록’을 남겼다.
한편 이순신은 10월 3일에 고군산도를 떠나 영광 법성포에 도착하여 5일간 머문 후 10월 9일에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은 왜군들에 의해 초토화되어 있었고 왜군들은 아직도 머무르고 있었다.
10월 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일찍 떠나 우수영에 이르렀더니 성 안팎에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사람의 자취도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쳤다고 한다.
날이 막 어두워질 무렵에 김종려, 정조, 백진남(옥봉 백광훈의 아들) 등이 와서 만났다.”
10일 밤에는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해남에 있는 적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전하였다. 11일에 이순신은 정탐꾼을 해남으로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였다.
해남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왜적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었다.
그랬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1만 명의 왜군은 9월 16일 정읍회의 이후 전라도로 남하하여 장성·나주·영암을 거쳐 9월 27일에 해남에 진주했다.
이들은 10월 10일까지 해남에 머물면서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11일에 해남을 떠난 것이다.
이후 시마즈는 10월 29일에 경상도 사천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이순신은 10월 11일부터 29일까지 18일간 안편도(신안군 장산도)에 머물렀다.
13일에 이순신은 정탐군관 임준영으로부터 왜적의 형세를 들었다. 해남으로 들어와 웅크리고 있던 적들이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다음 날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다.
또 해남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왜적에게 달라붙어 지방 선비들을 많이 죽였다는 것이었다. (10월 16일에 이순신은 송언봉 등의 목을 베었다.)
10월 14일에 이순신은 충남 아산 본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막내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편지 봉투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전사하였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밤 10시쯤 비가 내렸다.”
왜군들은 명량해전에서 패한 보복으로 이순신의 가족들이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본가와 마을을 통째로 불지르고 초토화 시켰다. 이순신의 막내아들 면은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가 왜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 스무 살이었다. (이순신은 부인 방씨 사이에 회·열·면 3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다. 회와 열은 이순신 휘하에서 일하였고, 셋째 아들 면은 아산 집에 남아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다.)
15일도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부하들이 조문을 하였지만 이순신은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16일에야 이순신은 소금 굽는 강막지 집에 가서 홀로 목 놓아 울었다.
19일에 이순신은 또 다시 통곡하였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