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하도에서 겨울 나기
이순신은 아들 면의 죽음에 비통하면서도, 일상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1597년 10월 20일부터 이순신은 겨울나기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해남 등지에서 군량을 확보하였고 김종려를 소음도 등 13개소의 염전을 관리하는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 이순신은 신안 안편도에서 보화도로 진영을 옮겼다. 보화도는 지금의 목포 고하도이다.
10월 2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맑다. 새벽 두 시 첫 나팔을 불어 배를 띄워 목포로 향했다.
목포에 이르렀다가 보화도에 옮겨 배를 정박하였더니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아주 좋기에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보화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월동준비를 하였다. 군량 확보와 전선 건조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11월 6일에 새 집 지붕을 이었고 군량 창고도 같이 지었다. 7일에는 새 집의 마루를 놓았고, 8일에는 사방 벽에 흙을 발랐고 수루도 만들었다. 11일에는 새 집도 지어졌다.
아울러 이순신은 주변지역으로부터 군량을 조달했다. 해남에 왜군이 남긴 군량 300여석을 접수했고, 각 고을 수령이나 유력자들도 양곡을 가져 왔다.
그러나 1천여 명이나 되는 군사에게 먹일 식량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하였다.
배가 운행 시는 반드시 통행첩을 소지하게 하고, 통행첩이 없으면 간첩으로 처벌하였다. 통행첩 발급시 배의 크기에 따라 수수료를 받았는데 대형은 쌀 3석, 중형 2석, 소형 1석으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열흘 동안에 1만 여 섬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나섰다.
왜군 수군과 대적하는 데 전선 13척으로는 크게 부족하였다. 더구나 고하도에 정착한 지 4일 만인 11월 2일에 전라우수사의 배가 바람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부서졌다. 이순신은 병선군관 당언량을 잡아다가 곤장 80대를 쳤다.
11월 중순 이후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박차를 가하여 병선 40척을 건조하였다. 그 증거가 1598년 2월 22일의 ‘선조실록’이다.
“ (...) 병선(兵船)에 대해서는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다시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었다. 통제사가 이미 40척을 만들었는데 이 숫자를 합하여 경리에게 보고하였다.”
한편 고하도에서 머문 수군에게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데 대한 포상이 내려왔다. 거제 현령 안위가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승진하는 등 휘하 부하들이 차례대로 포상을 받았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은 이순신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전하였다. 명나라 경리 양호는 이순신의 배에 붉은 비단 깃발을 직접 걸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깃발만 전달하였다.
# 삼도수군통제영, 완도 고금도
목포 고하도에서 108일간 머문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에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고금도는 이순신의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었다.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병력 증강과 전선 추가 건조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흥양현감 최희량이었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목재를 끌어서 전선을 건조하였으며 구리와 쇠들을 실어다가 대포 등을 만들었다. 최희량이 남긴 ‘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에는 새로 건조한 전선과 집물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7월경에 조선수군은 함대가 80여 척으로 늘어났고 군사도 8천 명에 이르렀다. 이순신에 의지해 피난 온 백성들도 1,500명이나 되어 섬에는 수백 호의 민가가 생겨났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