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년에 조선은 에도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쇼군 세습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들은 에도를 다녀오는 길에 교토에 머물렀는데 1625년 1월 17일에 대불사를 찾았다.
부사 강홍중(1577-1642)의 『동사록』을 읽어보자.
“1625년 1월 17일 맑음.
사시(巳時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시가지를 지나 대불사(大佛寺)를 찾아가니, 대불사는 왜경의 동남방에 있었다. 현방과 더불어 두루 보니 금부처 하나가 당중(堂中)에 있는데, 그 높이는 10여 장(丈)이요, 그 둘레는 한 산더미와 같았다.
층탑(層榻)과 사벽(四壁)은 모두 황금으로 칠했으며, 건물은 크고 헌걸스러워 기둥의 크기가 세 아름이었다. 바닥에는 큰 돌을 깔았는데 깎고 갈아서 매끄러웠으니, 그 제도의 장려(壯麗)함이 천하에 둘도 없는 거찰(巨刹)이었다.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중수한 지 겨우 20여 년이 된다 한다.
대불사 절 앞에 봉분(封墳)과 같은 높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왜인들이, “수길이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秀賴)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하며, 어떤 사람은, “진주성이 함락한 후에 그 수급(首級)을 이곳에 묻었다.” 하니, 들으매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후략)”
코 무덤을 본 강홍중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진주 출신인 그가 진주성이 함락된 후에 전사한 조선 군사들의 수급을 이곳에 묻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욱 통분하였으리라.
1655년에도 조선통신사들은 에도(지금의 도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교토를 들렀다. 종사관 남용익의 11월 16일자 『부상일록(扶桑日錄)』를 읽어보자.
“아침에 비오고 낮에 흐림. 왜경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대진(大津)에서 점심을 먹는데 하총수(下總守)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이어 대불사에 들러 구경하기를 청하였다.
의성이 또 간청하기를, “절이 길가에 있어 몇 리 밖에 되지 않는데 전부터 사신이 다 들러서 구경하였으므로 하총수가 이미 와서 기다리니 조금 머물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허락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4시경)에 절에 당도한즉 하총수가 미리 좌석을 설비하였다가 곧 나와 뵙고 물러갔다.
이어 삼중 찬합 및 술과 과실을 바쳤다. 의성의 부자 및 중달ㆍ소백 두 중이 대문 안에서 영접하고 또한 각각 찬합을 바치므로 곧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금 있다가 나와서 초혼(初昏)에 왜경 본국사에 도착하였다. 하총수 및 의성이 밖에서 문안하였다.
대불사는 층각(層閣)이 매우 높고 좌불(坐佛)의 금상(金像)이 높이는 10장(丈)이 넘고 너비는 4~5장이요, 한 손바닥의 크기가 거의 한 칸에 차고 무릎에서 정수리[頂]에 이르는 높이까지 1장(丈) 간격마다 불상 하나씩 붙였는데 좌우에 무릇 25불로서 그 부처 하나의 크기가 보통 사람만 하다. 왼쪽의 긴 행랑에는 3만 3천 3백 33불을 세웠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천가강이 풍신수뢰(豐臣秀賴)의 재물을 소비시키기 위하여 크게 보시(布施)하라고 유혹하여 이 절을 창건하게 하였다 한다. 불상이 굉장하기로는 극도였다. (후략)”
이후에도 조선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하였을 때 에도 막부는 대불사에서 연회를 베풀고 인근의 코 무덤을 보여주었다.
코무덤은 일본의 무위(武威)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조선통신사들은 마지못하여 코무덤을 보았다. 그리고 잔혹성과 야만에 치를 떨었다.
한편 1719년에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두 편의 가부키가 오사카에서 공연되었다.
하나는 『본조 삼국지』로 2월에 다케모토자(죽본좌)에서 공연되었고, 다른 하나는 『신공황후 삼한책』으로 5월에 도요다케자(풍죽좌)에서 공연되었다.
『본조 삼국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윤색한 가부키이다. 히데요시는 삼국을 항복시켜 삼국 왕으로부터 피로 쓴 항복문서를 받는다.
이어서 히데요시는 병사들이 벤 적들의 귀를 가지고 와서 교토에 묻고 묘를 만들어 준다. 가부키에 귀무덤(사실은 코무덤)이 등장하고 있다.
이를 본 일본인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인식이 가 득 하였으리라.
메이지 시대에도 히데요시에 대한 가부키가 자주 무대에 올랐다. 가부키에 출연한 주연 배우들은 공연 전후에 풍국신사와 코 무덤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거금을 희사하고 코 무덤의 울타리 석책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하였다.
실제로 코 무덤 울타리 석책에는 죽본좌, 풍죽좌란 가부키 극장의 이름과 배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