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1597) 7년 전쟁은 ‘도자기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왜군은 조선의 도공들을 사로잡아 데려가고 조선의 도자기를 가져갔다.
‘도자기 전쟁’의 범위를 넓히면 ‘문화 약탈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전쟁 초기부터 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금속부, 보물, 가축부 등의 별도 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을 약탈하고 조선인을 잡아갔다.
일본은 많은 도공들을 일본으로 잡아갔다. 대표적인 도공이 아리타의 이삼평과 가고시마의 심당길이다.
몇 년 전에 규수 아리타와 우레시노 그리고 나가사키 패키지 여행을 하였다.
사가현 아리타(有田)에서 일본 도자기의 비조(鼻祖) 이삼평 (미상~1656)을 만났다.
아리타 사라야마(명산 皿山 명은 그릇·접시라는 의미) 산 중턱엔 ‘도산신사(陶山神社)’와 ‘도조 이삼평 비’가 있다.
아리타 시내에 도착하여 이정표를 따라가니 철길이 나온다. 거기에는 ‘도산신사 입구’라는 표시판이 있고, 철길을 지나니 도산신사 경내이다.
도산신사는 1658년 8월에 세워진 신사이다. 원래는 인근 이만리의 가미노 하라 하치만궁(八幡宮)에서 주 제신인 오진(應神)왕의 영령을 옮겨 신사를 세우고 ‘아리타 사라야마 소뵤 하치만궁’이라 이름했다.
그러다가 1917년에 이 지역 유지인 후카가와 로쿠스케(深川六助)가 아리타 요업 300주년인 1917년에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추앙하고, 신사에는 사가번 초대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도조 이삼평을 오진왕과 함께 모시고, 신사의 언덕에 ‘도조 이삼평 비’를 세울 것을 제안하여 주민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때 신사의 이름을 ‘도조신사’로 바꾸었다.
1617년은 아리타 도자기 창업 연도이다. 원래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의 조선 도공(陶工) 납치계획에 따라 사가(佐賀)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납치되어 가라쓰(唐津) 근방에 상륙하였다.
이때 함께 끌려온 도공은 155명에 이르렀다.
이삼평은 처음에는 나베시마의 참모인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져 다쿠 마을에 살며 도자기를 만들었다.
이 도자기가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이다.
1616년경에 이삼평은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아스미산(泉山)에서 백자광(白磁礦)을 발견하였고, 시라카와에서 덴구다니 가마를 열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다쿠의 하녀와 결혼한 후에 가나가에 산베이(金ヶ江三兵衛)라는 일본 이름을 얻은 이삼평은 일가족 18명과 함께 아리타로 이사하여 백자를 만들었다. 이는 일본 도자기 산업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1631년에는 다케오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던 미망인 백파선이 일족 906명을 이끌고 아리타로 이사왔다.
이처럼 아리타는 이삼평이 가마를 연 이후 많은 도공들이 몰려와 일본의 대표적 도자기 마을이 되었다.
도산신사 경내에는 여러 기념비과 현창비가 있는데, 이삼평을 도조로 추앙하는 일을 추진했던 후카가와 로쿠스케 동상도 있다.
그런데 후카가와 동상 옆쪽에는 ‘달맞이총(月見塚)’이 있고 ‘바쇼하이쿠비(芭蕉句碑)’ 설명 안내 도판이 있다.
“ 바쇼 하이쿠비 (달맞이총)
구름 따라서 雲折く
사람을 쉬게 하는 人を休ぬゐ
달맞이런가 月見かな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가 42세 되던 1685년 가을에 지은 하이쿠[俳句]이다. 이 비는 1772년에 건립되었다.
소화 62년 (1987년)
아리타마치 교육위원회”
하이쿠는 5·7·5의 3행 17음(音)의 단시(短詩)로 촌철살인적 느낌이 있는 시이다.
마쓰오 바쇼는 방랑시인으로서 하이쿠를 잘 지었다.
오래된 연못 古池や
개구리 뛰어드는 蛙飛び込む
물보라 소리 水の音
그가 지은 이 하이쿠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하이쿠로 꼽힌다.
그의 또 다른 하이쿠도 감상해보자
교토에 있을 때도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나는 교토가 그립다.
이처럼 전국 각지를 방랑하며 많은 하이쿠를 남긴 바쇼는 1694년에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오사카에서 객사(客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