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두 바퀴로 해서 우리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었다. 또 작년에 노무현대통령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인권의 날 행사에서 소개한 말도 기억난다.
그때
노무현대통령은 인권의 문제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던 1999년에 김대중대통령이 인권위원회를 만들자고 하여 의아했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는
대통령이 된 후에야 당시 인권위를 만들었던 것이 얼마나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갑자기 철지난 용비어천가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대통령으로서의 DJ가 공도 많은 반면 잘못된 과실도 많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나 인권에 대한 고려와
경제발전이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어떤 정치인보다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민주주의의 진전이 경제발전이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의 정치철학이 구체적으로 시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최근의 신문지면을 가장 많이 채우는
기사들을 보자. 가장 많이 일간지들의 1면 톱을 장식하는 기사는 탄핵심판과 상생의 정치, 이라크에서 미군이 저지르는 죄악상과 우리 군의 파병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견 이 둘은, 하나는 국내정치와 관련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것으로, 전혀 다른
분야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두 기사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탄핵심판의 원인은 이미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정치인들이 일반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10~20%의 의사를 국민의 의사로
안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탄핵을 주도했던 정치권을 ‘물갈이’한 것이고, 비교적 정치적 판단을 하는 헌법재판소에서도
주지하는 바와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에 충격을 받았는지 최근 정치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상생의 정캄를 하겠다고 열심이다. ‘상생’이라는 좋은 단어가 들어있는데도 별 감흥이 없는 것은 필자만의 경우일까?
그것이 국민
모두의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도모한다는 의미라면 좋지만, 필자가 받아들이기에는 여야 정치인들만의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씁쓸한 심정이다.
이라크사태와 우리 군의 파병문제는 더욱 심각한 사안이다. 최근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들, 즉 미군과 영국군이 이라크인 포로들에게
저지르는 잔혹행위는 인류의 문명사를 뒤집는 엄청난 죄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폭력의 상처와 민주화의 경험이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그러한 범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하고, 그에 상응하는 외교적 행위를 해야만 했다. 만델라가 미국과 영국의 행위를 비난하듯, 우리의
정치지도자들도 정의를 내세워야만 했다.
그러나 이라크파병을 철회하자는 주장은 아직도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다.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와 경제적 이득을 내세워 파병을 강행하자는 입장이 주류인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앞의 두 사안이 지닌 공통점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고 일부 엘리트들의 생각을 국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 경제적 이득이 있으면 정의를 무시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은 사실 민주주의가 부재한다는 징후이다.
두 기사만이 아니다. 필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 동일한
현상을 발견하고 있다. 독재권력이 문제가 되는 시대는 지났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여전히 독재권력이 살아있는 것이다.
국가경영 능력의 아마츄어리즘이
이제는 프로패셔날리즘(Professionalism)으로 전환되리라고 하는
기대감도 확실성도 어떠한 담보도 마련되지 않은 채 마무리된
탄핵소추 기각 결정선고는
파면과 재선거가 수반하게 될 사회적 비용을 우선 고려한
고심의 흔적을 통해
결국은 한국의 평균치로서의 민주주의의 수준을 읽고 반영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보겠습니다.
국민의 대표자를 선정 판별하는 성숙도가 언제라도 무리없이 작동되는
민주주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비용이 더 염려되어 국가질서 유지의 최후보루 체제로서의
현실적 판단을 결론으로 도출하여야 했음을 보며
정의라는 것도 민주라는 것도
시대 상황에 맞추어 가야 하는 상대적인 기준 개념이지
절대개념으로서의 무슨 합격점 커트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합점수를 매기자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성장단계 - 몸은 다 컸으나 정신적으로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미숙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춘기 단계처럼 - 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미성숙의 근본적인 원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랜 기간을 세대를 이어가며 계속되어온 군사독재의 정신적 피해의
후유증이라고 보여집니다.
군사독재 권력의 야만성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반대자들에 대한 육체적 고문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탄압보다도
학문에 대한 탄압이
그 회복에 있어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임을 저는 학창시절부터 직감해왔습니다.
학문의 자유와 그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질식되어온 오랜 세월 동안
지식인들의 다양하고 풍성한 "정의"에 대한 개념 논의를 일상속에서
자주 접해볼 수 없는 일반 민초들의 - 언론사의 논객들을 포함하여 -
민주의식과 그 외연적 표현 반응 행태는
민주라는 개념과 다양한 가치의 공존 방식과 그 질서유지 방법 및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주체적 자립 능력이라는 실천적 측면에서
자존(自存)의 능력을 훈련받을 기회를 상실해왔음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저항정신의 꽃으로 찬미되어온 5.18 정신이라는 것도
정의가 아닌 것에 대한 직감적인 거부반응의 예민한 감수성으로부터
발아되었지만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외교적 대안제시 능력이라는
자존(自存)의 능력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고
가장 말초적인 반응양식의 하나인 집단주의적 싹쓸이 투표문화 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조차 여전히 그 양태가
변하지 않았음을 보였듯이)
더 나아가 국제관계에서도 정의가 정의로 구체화 실천되기 위해서는
관련 당사국 간의 힘의 균형이 절대적 필요조건으로 요구되는 바임에도
힘의 결집과 신장에는 (힘의 재생산 구조인 교육제도를 포함해서)
전혀 강대국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고 하는
현실적 관계적/상관적 한계 상황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감히 엇따 대고 말대답이야," 하는 문화가
우리 속에 여전하며
강대국에 대하여 심지어는 김일성 부자보다도 뱃심도 묘기능력도 없는
굴신외교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단계이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돌 던질 것도 없이
부자가 부자이기 때문에 비아냥을 받고
인재와 둔재가 섞여 함께 공부해야
평등하고 민주적인 삶의 가치 조건이 실현된다고 인식되는
그 "배 아픔"의 의식이 깨어지지 않는 한
여기서 지적하신 "민주"와 "정의"의 이념과 실천능력 사이의 괴리는
한국사회의 봉건적 의식구조와 군사독재의 피해 후유증이 재진단되고
치료방법이 모색될 때까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셋말로 먹고 살기가 바쁘다는 이유로
이를테면
전두환 노태우 같은 인물들을 국립묘지에 묻어야 하는 것인지
대통령 취임식장에 그렇게 매번 초대를 해야 국가체면이 서는 건지
하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눈 돌릴 여유가 없는 척박한 민주 의식과 제도 절차도
아직 우리에겐 가야 할 먼 길이 남아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겝니다.
용서와 망각과 청산의 구분 경계선이 모호한 채로
그때 그때 선동적 프로파갠다와 정치적 집단 동원 기술에
세칭 그 바람몰이에 휩쓸려 몰려다니는
집단주의 지역정서를 보이는 때문입니다.
이른바 묻지마 투표의 원조 의식 말입니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용서하는
그래서 역사속에서 배우지 못하는 - 시행착오 학습능력의 축적에 더딘
지식인들의 침묵과 비민주성에도 일단의 섭섭함의 붓자국 한 획을
묻혀야겠습니다.
그 실천적 대안제시 능력이 키워질 때까지
이젠 제발 과거반추형 5.18 정신도 그만 울궈먹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을 풀지 못하고 여전히 담고 가는 가슴으로는
여러분들의 자랑인 5.18 정신도 국민정신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다만 지역정서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철에만 외부 방문자들을 받게 되는 기념행사로만 남을 것이기에...
지난 50년 동안의 독재권력은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돌던지기 문화속에
아직도 우리를 잡아 가두고 있음을 보는 겁니다.
이 미숙한 정서적 반응 양식은
강대국 미국이 왜 강대국이 되었는지 - 그 국가에너지 동력구조를
분석하고 그 강약점을 배우려는 지피지기 전략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동등한 힘을 기르려는 각오도 촉구도 와신상담의 인내도 없이
그저 "반대" 운동 촛불시위의 굿거리판만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 정상에 오르는 힘을 기르는 베이스 캠프인 교육이
이 나라의 백년대계 미래 청사진을 방향잡지 못하고
전교조라는 교육자들의 단체는
정치참여를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는 단계일 뿐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함께 굴러야 하는 수레의 두 바퀴임을 발견한
그 선각자도 자식 농사를 잘 못지어서 실패한 - 거의 멸종된 후예들을
남기고 사라져갔을 뿐인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