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 자유기고가
▲ 이휘현 자유기고가 | ||
6년의 학부 시절과 2년의 대학원 시절만 본다면 만 8년의 학생 시절을 보낸 셈이지만, 나의 생활 반경과 정신의 편력을 고려해 보면 내 지난 12년의 삶은 꼬박 대학의 캠퍼스 안을 맴돌고 있었다 할 만 하다. 닳고닳은 말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게 있지만, 나는 정말이지 지난 12년 동안 대학의 변화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변화는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정말 가파른 것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1992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이후 2004년의 노무현까지, 내 대학시절을 장식한 이 나라의 대통령이 4명에 이르니 말이다.
1980년대 정서의 여진 탓이었겠지만, 1992년의 대학은 여전히 이념에 대한 열정과 과잉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최루탄의 매운 가스는 분명 서서히 옅어져 가고 있었으나, 그래도 사회에 대한 정의심은 오롯이 살아있던 때였다.
나 또한 그 열정과 과잉의 언저리에서 때로는 들뜨고 때로는 상처받아가면서 양심의 목소리를 내면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하지만 변혁운동의 중심축이 캠퍼스에서 노동현장으로 기울게 된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대학은 급격하게 활기를 잃었던 듯싶다.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이 넘쳐나던 대학생들의 총기는 언제부턴가 서서히 사라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수능시험을 통해 다시 대학에 들어간 1998년쯤에는 이미 취업준비생이라는 대학생의 허약한 허우대만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정치성’을 띤 목소리들이 캠퍼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건 철저하게 소수자와 주변부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더 이상 ‘함성’은 대학 문화의 중심 아이콘이 되지 못했다.
물론, 먹고사는 일차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대학생들을 무조건 폄훼하려는 뜻은 아니다. 허나, 취업이 대학생활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토익 학원과 공무원 입시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요즘 캠퍼스의 풍경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멀쩡한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부치는 몰상식한 정치인들이 여전히 큰 소리를 내는 요즘의 이 나라에서, ‘너무도 조용한’ 캠퍼스가 문득 생경해지는 탓일 게다.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 여전히 상식으로 통용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를 바라보면서, 상아탑의 침묵이 조금은 답답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탓도 있을 게다.
그렇다고 지난 2004년 한 해 동안 이 침묵의 캠퍼스에 좌절과 무기력함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올해 3월 탄핵정국 속에서의 함성과 열기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거칠게 뛴다.
더군다나 그 뜨거웠던 거리 위에는 많은 숫자의 대학생들이 대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흥분시키는 희망의 불씨였지만, 그 불씨는 그 이후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쉽게 사그라들어 버린 듯하다.
오랜만에 나부끼던 캠퍼스의 깃발은, 탄핵정국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함 속으로 침잠해 버렸던 것이다.
상식이 여전히 상식으로서 통용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대학생들이 올바른 정의를 위하여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가 아닐까. 철 지난 소리라고 빈축을 살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깊은 겨울잠에 빠진 한국의 대학을 향하여 여전히 이렇게 외치고 싶다.
“너무도 조용한 당신, 깨어나라!”
/이휘현 자유기고가 - 한겨레신문 '야!한국사회'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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