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날씨가 매우 흐리고 추웠지만 정율성 음악가를 꼭 찾고자 마음먹고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양림동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남구청사에서 25분 정도 걸어서 양림휴먼시아아파트 앞에 목청을 길게 높이고 손짓으로 제스쳐를 하는 구리 빛 흉상이 있었으니, 이분이 정율성 음악가이다.
정율성은 이국만리 중국에서 조선을 위해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로 활동하다 북한에 들어가 많은 음악활동을 했던 사람으로 중국 주석인 주은래에 의해서 중국으로 귀화했던 사람이다. 이국만리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한중수교의 효과로 다시 고향땅을 밟게 된 풍운아정율성!. 인간역사의 흥망성쇠는 후세인들에게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귀한 거울인지도 모른다.
양림동에 세워진 정율성 흉상은 “정율성 선생에 대한 공경과 기리는 마음을 표현하며 이것은 바로 큰 의미를 가진 한중청년들의 문화교류입니다. 한중청년들의 우의가 영원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8년 8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주 남구는 어느 지역보다도 정율성이라는 음악가로 인해서 중국과 문화의 교류가 한층 가까워진 것이므로 이를 잘 활용하여 모든 면에서 활발한 진척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광주 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세워진 “정율성 흉상은 2008년 남광주청년 회의소가 중국 광저우시 하이저우구 청년연합회로부터 기증받아 우리 지역민의 모두의 뜻을 모아 이곳 정율성로에 설치하였습니다. 2010년 11월 12일” 로 기록되어 있다.
정율성 흉상은 “중국 광저우시 하이저우구 참사 저우수기엔”의 발의에 의해서 “중국 광저우시 하이저우구 청년연합회가 주관”이 되어 제작된 것이다. “라이시캉”의 창작품이다.
우선 정율성에 대해 알아보자. 이 부분은 누리망 위키백과를 일부 인용했다.
정율성은 중국발음으로는 정뤼청으로 중국 작곡가이며, 항일운동가로 소개되고 있다. 본명은 정부은. 1918년 8월 13일 출생했고, 1976년 12월 7일 사망했다.(출생일이 1914년 7월 7일로 기록 된 것도 있음)
출생지가 광주군 광주면 부정동 94번지(광주광역시 불로동과 양림동 등 확실한 것은 없으나 양림동으로 확인)이다.
1933년에 형과 함께 중국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러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고,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항일가요를 불러 호평을 받았다. 이 기간동안 “음악(律)으로 성공(成)하고 싶다.”는 의미로 정율성으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1937년에는 시안의 팔로군 당국의 주선으로 옌안에 머무르면서 음악활동과 항일투쟁을 병행했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초기 대표작인 延安頌(연안송)을 작곡했다. 연안송이 작곡된지 68년이 됐지만 아직도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이며 중국인들의 동경과 사랑의 감정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음악으로 불리고 있다.
1939년에는 옌안 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장용년(예명 공무)의 시에 곡을 붙인 칸타타“팔로군대합창”을 작곡했는데 이 곡에 삽입된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공식군가”로 채택되었다.
이후 루쉰문예학원, 허베이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에 근무하면서 계속 작곡활동을 했고, 중일전쟁 종전 후인 1946년에는 북한으로 옮겨가 황해도 해주에 음악전문학교를 세우고 조선노동당 황해도당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이듬해 평양에서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현 조선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해 초대 단장에 부임했고,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현 김원균평양음악대학) 작곡학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저우언라이(주은래)의 요청으로 다시 중국으로 옮겨가 1950년 10월에 정식으로 중국에 귀하했고, 1952년부터 베이징 인민예술극원과 중앙악단 등의 전속 작곡가로 재직하면서 오페라. 칸타타. 동요. 군가. 가요 등 300여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창작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으로부터 반당분자라는 공격을 받아 투옥되었고 이 기간동안 당한 혹독한 고문과 수감생활로 인해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문화대혁명 말기인 1976년에 출감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베이징 근교의 호숫가에서 낙시를 하다가 쓰러져 사망했다. 1년 뒤인 1977년에는 중국음악가협주회 주최로 추모 음악회가 개최되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이후 중국의 대표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8월에는 신중국 창건 모범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 하얼빈에서는 정율성생애사적전시관이 개관했다.
북한에서도 같은 혈통이고 초기 북한 음악계의 성립에 공헌했기 때문인지 정략적으로 띄어주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북한 체제시절 작곡한 “조중친선의 노래”는 지금도 중국과의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음악가 정율성”이라는 영화도 만들었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적성국들인 중국과 북한에서 주로 활동했고, 중국으로 귀화한 이유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지만 민주화와 한중수교 이후 한국에서도 연구와 재평가가 진행되어 출생지인 광주광역시에서는 정율성음악회가 연례행사로 개최되고 있다.
2012년 1월 16일 KBS에서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는데, 방송 이후 KBS의 간부 노조(공정보도노조)와의 여러 보수단체에서 중국공산당에 충성을 바친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독립운동가로 미화했다며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정율성은 정확히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생가라고 주장하는 곳만 3곳이며, 그 중 두 곳이 광주광역시의 인증을 받았다.
정률성의 생애를 연보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914년 7월 7일에 광주군 광주면 부정동94번지(현 불로동163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신흥중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에 중국난징에 도착하고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혈단에 가입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1936년에 그는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다.
1939년에 중국공산당 가입과 동시에 <팔로군 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하였다.
1945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들어가서 조선인민구락부 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했다. 그 후에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1950년 조선전쟁당시 중국 주은래(주은래)총리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률성을 중국으로 보내어 음악사업에 몸바쳐왔다. 이후 , 중국국적에 가입했다.
1976년 12월 7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팔보산 혁명 공동묘지(八寶山革命共同墓地에 안장되었다.
정율성의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옌인송. 팔로군 행진곡. 연수요. 싱안링에 눈이 내리네. 십륙자령 3곡. 오페라 <망부운>. 벌목요. 생산요. 강대한 함대 바다에서 행진한다. 우리는 행복해요. 초록빛 조국. 소산에 이르러. 매화를 읆노라. 장정. 진아를 기다리며. 청평악-육반산. 물길에 내마음 싣고. 심원춘-장사. 포정함대출정했다. 광창길에서. 매령3장. 우리는 행복해요.
정율성 흉상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는 춥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꽉 끼어 있어 인간의 희노애락과 흥망성쇠를 하늘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이국 땅에서 외로움 만큼이나 차거운 바람만 불어대는 대로에서 목청을 다듬고 손으로 제스쳐를 하는 모습은 허전해보였다.
하늘이 내린 음악가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나 허술하고 쓸쓸하며 품격이 없어 문화의 향기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흉상 뒤의 대나무울타리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광주시의 문화의 척도를 가늠할 정도이다. 정율성에 대한 정보가 입석으로 되어 있어야 서서 읽어보거나 하는데 앉아서 쭈그리고 읽어봐야 하는 불편도 있었다.
흉상이 있는 곳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단상의 버튼만 클릭하면 일생일대기가 나타나는 동영상이 있어야 하고 시청하는 앉을 좌석이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이 보고 듣고 정율성음악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인데 그런 시설이 없어서 아쉬웠다.
현 상황에서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견학을 와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마음에 새길 것인가?. 문화는 돈을 먹고 자란다.
이왕에 머나먼 중국 땅에서 유명인사가 흉상으로 나마 고향으로 금의환향했으면 그에 걸맞게 생애전시관을 건립해서 차분하게 앉아서 해설사가 해설하든가, 동영상을 시청하면서 문화의 향기를 느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시아 문화전당을 건립하는 마당에 함께 주변 환경을 아시아문화도시답게 모습을 바꿨으면 한다.
정율성로 도로는 휴먼시아 벽에다 동영상을 시설을 했으나 주차가 많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시설에 관심이 없었다. 근처의 가게 주인들도 정율성음악가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였다. 그곳 정율성로에 거주하거나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청에서 반상회 등을 통해서 정율성 음악가에 대한 정보를 숙지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정율성 생가의 이정표도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음 골목 앞에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어서 찾기가 힘들었다. 정율성 생가 부근을 재개발하면서 정율성 생가 복원과 생애전시관 등, 정율성 음악연구관 등을 건립해서 중국 모범 100인에 걸맞게 부각시켜서 활발한 한중문화교류의 교두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끝으로 아시아 문화전당을 건립하는 마당에 정율성로도 주변 환경을 아시아문화도시답게 모습을 바꿔 후대인들의 배우고 느끼고 귀감이 되게 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