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전한다. “만나면 필연적으로 헤어진다”라는 뜻이다. 평범한 말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우주 만물은 만남과 이별의 서사를 끝없이 써 내려간다.
부모와 자식, 부부, 친구, 스승과 제자, 심지어 길에서 스친 낯선 이까지, 누구라도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다. 이 법칙은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과 장소, 사람과 추억, 나아가 사람과 우주 사이에도 이 숙명적인 흐름이 존재한다. 우리는 만남에 기뻐했다가 이별에 슬퍼하며,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삶을 이어간다.
만남은 운명이고, 헤어짐 역시 운명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만남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고, 헤어짐도 헤어지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이 단순한 듯한 말이 때로는 무겁게 다가온다.
나는 지금, 15년간 내 곁을 지켜온 반려견 복동이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다. 지난 4개월 전, 동물미용실 주인이 “이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라고 말했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준비란 말은 어쩌면 스스로를 속이는 위안일 뿐이다.
복동이는 노견이 되어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눈은 백내장으로 흐릿하며, 장기는 온갖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더 이상 내가 해줄 일이 많지 않다. 그저 이 작은 생명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순간까지 슬픔으로 지켜보는 것밖에는.
동물병원에 복동이를 데려갔더니 수의사가 말했다. “곧 먹지 않게 되고, 움직임도 줄어들 겁니다.” 그 말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프다. 복동이의 생명의 촛불이 점점 사위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에 가깝다.
사람이라면 “어디가 아프냐?”, “기분이 어떠냐?”, “먹고 싶은 게 없느냐?” 물으며 따뜻한 말을 건넬 텐데, 말 못 하는 짐승이라 그저 새벽녘 낑낑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 우유를 데워 주고, 품에 안아주는 게 전부다. 왜 우는지,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어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저 손으로 목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라고 속삭여 주는 것이 전부다.
나는 매일 저녁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부디 복동이가 고통 없이 평화롭게 떠나게 해주세요.” 기도를 하면서도 문득 의문이 든다. 사람도 아닌 반려견을 위한 기도를 신이 들어주실까?
하지만 세상 만물은 신의 창조물이라 믿기에, 이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기를 바란다. 복동이의 숨소리가 점점 약해질 때마다, 나는 이 작은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성을 다한다.
왜 만물은 태어나고, 만나고, 헤어지도록 만들어진 걸까? 복동이의 마지막 날들을 지키며 나는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참으로 엉뚱한 것 하나를 깨닫는다. 이제 반려견을 키울 자신이 없다는 것을. 헤어짐의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무겁다.
우주는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동시에 냉랭하다. 모든 것은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법칙을 따른다. 생겨나고(成), 머물며 존재하다가(住), 수명이 다하면 허물어져(壞), 결국 사라진다(滅). 복동이도, 나도, 이 우주를 구성하는 그 어떤 것도 이 법칙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은 복동이를 ‘미물’이라 부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고 연약한 생명과 15년을 함께하며 나는 우주의 천리를 배웠다. 살아 있는 한 살아야 한다는 것.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 비록 말은 못해도, 복동이는 내게 충실했고, 나를 위로했고,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그 존재만으로도 내 삶은 더 따뜻했고, 더 풍성했다.
이제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하는 순간, 나는 슬픔 속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다시 생각한다. 복동이가 떠나면 내 곁은 텅 비겠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내 안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저 너머에서 복동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모습으로, 맑은 눈과 쫑긋한 귀를 가진, 꼬리를 흔들어대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모습대로 나를 반겨주기를 꿈꾼다. 복동아, 네가 내게 준 사랑과 추억을 잊지 않을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