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과 죽취봉, 후백제 견훤의 전설
구룡과 죽취봉, 후백제 견훤의 전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9.09.25 15:33
  • 댓글 0

광주시 북구 생룡동 생룡마을 범희연 할아버지

마을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남녀유별이 각별한 세대여서 일까. 남녀의 쉼터가 따로따로다. 아래쪽 당산나무에서는 망팔(望八·71세), 망구(望九·81세)들이 심심파적으로 화투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다.

▲ 범희연 할아버지
위쪽에서는 애년(艾年·50세)에 든 장년과 기로(耆老·60세 이상)의 노년들이 본격 수확기를 앞두고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다.

광주시 북구 생룡동(生龍洞) 생룡마을. 범희연(79)할아버지가 마치 자식을 대하듯 느티나무 한그루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할머니들에게 넉넉한 쉼터가 되고 있는 느티나무를 50년 전 자신이 심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는데 그만 죽어버렸어. 몹시 안타까워 하다가 어느 날 서른 살 동갑나기 친구 다섯 명이 담양에 구경을 갔는데 맞춤한 나무가 있어서 옮겨 심은 거지. 지금까지 아무 잔병치레도 없이 이 만큼 자라 준 것이 대견하지.”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묻자 “삼각산에서 비롯된 산세가 구불구불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담양군 대전면 응용리 윗마을에 가면 여의주 형상의 동상이 있어. 그 여의주를 중심으로 용자가 들어간 마을이 전부 아홉 개야. 그래서 사람들이 이 주변을 통틀어 구룡(九龍)이라고 부르기도 해.”

▲ 아래쪽 당산나무. 할머니들 차지다.
실제로 인근 마을이름을 살펴본 결과 봉룡, 용두, 생룡, 용전, 용산, 오룡, 신룡, 용강, 응룡 등 9개 마을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생룡마을 뒤편에는 244m 높이의 죽취봉(竹翠峯)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죽취봉을 일명 견훤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전에 따르면 죽취봉이 견훤의 태생지라는 이야기가 있어. 공무원이랑 교수들이 여러 차례 찾아왔는데 문제는 문헌도 없고 자료도 없어. 그래서 그냥 추측만 할뿐이지.”

견훤대 주변에 일부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고 성안(城內)이라는 지명이 있어 일부에서는 견훤이 성을 만들어 웅거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생룡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다. 범 할아버지도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었다.

“소화 6년에 태어나 소학교 5학년 때 해방을 맞았어. 우리 마을은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자작농이 많은 마을로 통했지. 지금도 다른 마을에 비하면 자기 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이야. 옆 마을 용전만 해도 한 300호 되는데 자기 땅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시피 해.”

▲ 위쪽 당산나무. 아래쪽보다 수령이 낮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도회지로 빠져나가면서 빈집도 늘고 있다. 한때 100여 호를 자랑하던 가구 수는 현재 80여 호까지 줄어든 상태다. 생룡마을은 지금까지도 금성 범씨의 단일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타관바치들에게는 그만큼 배타적인 성역이었던 모양이다.

“단일 집성촌을 유지한 덕분에 한국전쟁 때도 희생자가 없었던 거야. 전쟁이 끝난 직후 군대에 가서 3년을 복무했지. 그리고는 결혼해서 4남매를 낳고 줄곧 여기서 살았어.”

중국 진서에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비범한 사람을 일컫는다. 구룡 가운데 한 자리를 꿰찬 만큼 마을에서 자랑할 만한 유명인사가 없지는 않을 터.

범 할아버지는 “그렇게까지 뭐”하다가 불현듯 생각난 듯 “범택균 광주시장”한다. 범택균 시장은 광주가 전라남도에서 아직 분리되기 이전에 관선시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집성촌이다 보니 명절을 맞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친척과 인척이다보니 집집마다 인사하고 세배를 하다보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 또 “마을을 돌다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한잔 두잔 받아먹은 술에 어느새 취기가 동해 있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래도 돌아보면 그 시절이 빛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이제는 명절도 마을회관에서 합동차례와 합동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간소화 됐다. 이웃을 돌며 따뜻한 정과 인심을 나누던 풍경도 빛바랜 흑백사진 속 기억으로만 남았다. 머지않아 한가위 추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