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중동지역의 어떤 나라 왕은 백성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날이 임했다며 심판의 기준을 선포했다.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던 이들은 의인이요, 새로 준비한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백성들은 그 기준에 따라 의인은 오른쪽으로 악인은 왼쪽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오른쪽에 선 사람들은 여짓여짓 의아한 표정이다. 어렵싸리 말을 꺼낸다. “우리가 대체 언제 임금님께 먹을 것을 드렸고,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우리는 병중에 계신 임금님을 돌봐드린 적도, 감옥에 계실 때 찾아간 적조차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임금님과 동격이란다. 우화 같은 이 얘기는 신약성서 마태복음서(25장 31~46절)에 나오는데 해마다 이맘때면 떠오르곤 한다. 12월 끝자락에 곰곰 지난 1년을 돌아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로 기억한다. 나는, 내 가족은, 우리들은 지난 1년을 어떻게 보냈는가. 사회적 약자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정말 한 번이라도 생각했었나. 답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는 연초부터 코로나19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 탓에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비대면, 3밀(밀폐·밀집·밀접) 경계, 마스크 필착, 비말(침방울) 차단 등 생소한 용어들이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요즘엔 코로나19의 3차 공세 탓에 하루 확진자가 천 명 안팎으로 솟구쳐 불안감에 정신이 아뜩하다.
우리는 올 2월과 8월의 코로나19 1, 2차 고비를 비교적 여유 있게 넘겨 온 세계에 K방역의 위상을 자랑했다. 하지만 겨울로 접어들면서 몰아닥친 3차 공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1, 2차 공세가 특정 지역의 모임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진 집단감염이었다면 지금은 감염원이 전국적으로 다양화되고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따로 없다.
정부가 수 십 조원의 추경을 편성해 재난지원금을 제공했지만 약발은 거의 언 발에 오줌 누기다. 경제활동인구의 25%를 웃도는 자영업자들은 이미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영업자들은 서구 영세사업자들처럼 정부의 폐쇄조치에 반발해 대모를 벌이거나 악장치는 일은 없다. 상황은 심각하지만 모두가 이를 악물고 버티며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치행사는 차질 없이 이어졌다. 4·15 총선을 통해 21대 국회가 출범했고 제1 야당은 선거 참패 이후 당을 일신하겠다며 간판도 바꿔달았다. 검찰개혁을 강조해온 정부·여당과 검찰의 독립성을 앞세워 버티는 검찰 간의 지루한 다툼도 이어졌다. 여기에 갈등을 부추기며 문제를 부풀려온 언론의 행보는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문제는 이 모두가 그저 그들만의 리그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삶의 현장이 흔들리고 있지만 관심은 좀처럼 그쪽으로 모아지지 않았다.
올해는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고 곱씹어봐야 할 일도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4·19 혁명 60주년, 5월 광주민중항쟁 4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 40주년, 6·15 선언 20주년 등등. 이 모두가 아직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현재에 대해 깊은 성찰과 고민을 공유해야할 문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남북은 여전히 대립 중이며, 민주주의는 흔들리고 있다. 노동 현장의 고통 역시 안타깝게도 여전하다.
해방된 지 75년, 물론 그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뤘다. 산업화와 압축성장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췄고 제도적 민주주의도 이뤘다. 문화적으로도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발신할 만큼 성숙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북핵 문제는 최대의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고, 세대·이념·노사·지역·남녀·빈부 간 갈등은 잦아들기는커녕 되레 더욱 커졌다.
대립·갈등사회로 치달아온 원인은 매우 다양할 터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고르자면 상대에 대해 조금도 경청하지 않는 우리의 무례함을 꼽고 싶다. 우리의 고질이다. 이너그룹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온정적이면서도 그 밖의 상대에 대해서는 배려 부재와 무시가 관행처럼 작동한다. 변화의 바람이 들어갈 틈이 없는 이너그룹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차꼬나 다름없다.
앞서 소개한 임금님의 심판기준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그는 “상대를 배려하는 이, 상대의 말에 경청하는 이가 곧 의인”이라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세밑에 갈등 가득한 우리 사회의 지난 1년을 돌아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공동선을 추구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사면이 다 막혔다고 해도 다시 눈을 들어 멀리 산을 보고 하늘을 바라보자. 제3자를 위한 너와 나의 배려가 사람을 다시세우고 세상을 바꾼다. 우리가 사는 세상, 제대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희망한다. 못 이룬 꿈은 새해에도 계속돼야 한다. 세밑은 다시 새해 첫머리로 이어질 테니. 새해엔 정말이지 서로가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