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8회]-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하다. (2)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8회]-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하다. (2)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25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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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7월 11일에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 원균을 사천으로 불러 원균이 직접 출정하지 않은 점 등을 질책했다. 그는 즉시 출전하라면서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해군 사령관이 3군 사령관에게 볼기를 맞은 것이다.

칠천교 (경남 거제시)​​​​​​​사진 2 칠천도 전경
경남 거제시에 위치한 칠천도 전경

분노한 원균은 7월 12일 새벽에 출항하여 칠천량을 거쳐 13일에 옥포에 도착하였고, 14일에 부산에 이르렀다. 부산 앞바다에서 조선 함대는 왜선들과 마주쳤다. 원균은 왜선을 좇았다. 그런데 왜군은 접전을 회피한 채 도주하였다. 원균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전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 7척은 물길을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하였다. 원균은 함대를 겨우 수습하여 15일 아침에 가덕도에 도착했다.

지친 수군들은 물을 구하려고 섬에 상륙하였다. 하지만 매복한 일본 육군에 의해 조선 수군 400여 명이 살해당했다. 원균은 급히 배를 끌고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물러났다. 그런데 이곳에도 왜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15일 오후에 원균은 풍랑을 무릅쓰고 함대를 이동시켜 밤 9시경에 칠천도에 도착했다.

조선 함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한 왜군은 함선 500여 척을 칠천도에 배치시켰다. 왜군은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야키, 와키사카 야스나루가 이끄는 정예 수군이었다.

원균은 밤늦게 작전회의를 열었다. 원균은 왜군을 당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한탄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경상우수사 배설이 팔을 걷어붙이며 싸움을 회피하는 전략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원균은 노하여 “죽고 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고함쳤다. 이에 배설은 자기 배로 돌아가서 은밀히 소속 장수와 더불어 퇴각을 도모했다.

이날 밤은 보름날이었는데 큰 비가 내렸다. 원균은 전선 4척으로 왜군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일본 수군은 가만히 왜선 10여 척으로 우리 배 사이를 뚫고 형세를 정탐하였다. 밤 10시를 넘어서 왜선 5∼6척이 불시에 내습하여 우리 배에 불을 질렀다. 우리 배 4척이 모두 불타고 침몰되었다.

칠천교 (경남 거제시)​​​​​​​사진 2 칠천도 전경
칠천교 (경남 거제시)

원균은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왜군의 내침을 알리었고 조선 수군들은 겨우 진을 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원균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警戒)’에 실패한 것이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야간 기습에 성공한 왜군은 7월 16일 새벽이 되자 500여 척의 왜선으로 조선 수군을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총공격을 하였다. 조선 수군도 닻을 내린 가운데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어서 왜군은 일본 배 5-6대로 조선 배 1대를 포위하고 조선 배에 올라와 백병전을 벌였다. 백병전이 벌어지자 원균은 후퇴하지 못하도록 수군을 독려하였으나 조선 수군은 계속 밀렸다.

마침내 조선 수군은 지탱하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배설이 자기 휘하의 전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고성 방면으로, 원균의 전라좌수군은 추원포 쪽으로 퇴각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끝까지 싸우다가 적진에 고립되자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한편 원균이 도망친 추원포는 서쪽으로의 뱃길이 막힌 육지였다. 이러자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휘하의 전라좌수군들도 판옥선을 버려둔 채 도망쳤다. 육지로 도망친 조선 수군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사에게 무참히 살육당했다. 원균도 왜군 칼날에 전사했다.

남원 출신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원균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난중잡록 1597년 7월 16일)

이렇게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조선 전선 160여 척이 분멸되었고, 거북선도 바다에 수장되었다. 한산도도 일본 수군에게 넘어갔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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