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나가면 빈 상가들이 눈에 뜨인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임대’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상가 앞을 지닐 때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한다. 유령의 집 앞을 지나는 느낌이 들어 얼른 지난다.
혼이 나가버린 시체처럼 무섭게 보이는 빈 상가들. 장사가 안되니, 월세 내기도 버거울 것이고, 겨우 알바 임금이나 버는 처지에 더 이상 상가 문을 열어둘 수가 없어서 문을 닫았을 터이다. 이런 상가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더 큰 문제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이름난 상가 거리에 있다는 초밥집을 찾아갔다. 이 집은 가격 대비 맛도 양도 괜찮은 식당이라고 아내는 말한다. 코로나 공포로 웅크리고 지내온 나를 손님들이 별로 없을 만한 시간대에 아내가 나를 이끌고 찾아간 것이다.
그 집의 음식 맛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퉁이에 있는 초밥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이어 수십 개의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이 거리를 식사 후 구경해보니 두어 집 건너 하나꼴로 상가가 비어 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 인파로 북적거렸던 이 이름난 상가 거리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반은 혼절해 있는 모습이다.
문을 닫는 상가들이 늘어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처럼 이런 쪽에 아무 것도 모르는 처지에서 볼 때 우선 상거래의 대부분이 온라인 주문으로 처리하는 탓이 클 것 같다. 상거래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거래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시대가 되다 보니 나 같은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나 오프라인 상가를 찾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가를 찾지 않는다.
인터넷 세상에서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들어 아파트 현관마다 상품박스가 서너 개씩 배달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온라인 시대를 실감하는 장면이다.
옛날에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점포를 찾아가 이것저것 살펴보고 점원과 물건에 관해 대화도 나누고, 가격 흥정도 하고, 이런 식으로 거래해서 사 들고 집으로 왔다. 요즘 사람들은 온라인 거래를 넘어서 아예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것 같다.
상품을 들고 다니는 것도 ‘노굿’인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더 많은 정보, 가격비교, 성능 같은 것을 확인해볼 수 있으니 굳이 품을 팔 이유가 없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감은 없어진 지 오래다. 단골이라는 말도 사라져 갈 처지다.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상가들의 경우에도 손님들이 그닥 없는 곳이 많다. 점원이 상가 안에 불을 환히 켜놓고 홀로 멀뚱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짠해 보일 정도다. 그러니까 임대라는 딱지가 붙지 않은 상가의 경우에도 언제 문을 닫을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코로나 사태 중에 많은 상가가 문을 닫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코로나가 어느 정도 수그러든 후에도 상가는 어두운 모습들이다. 빈 상가들이 늘어나는 것은 온라인 시대의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오르고 그 여파로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줄다 보니 사람들이 지갑을 열려고 하지 않는 탓도 클 것이다. 나부터도 되도록 극히 필요한 것 말고는 최대한 물건을 안 사려고 한다. 마트에 가서도 몇 번이나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한 끝에 한두 가지 식품을 산다. 물가가 너무 올랐다. 이런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전국이 반나절권으로 교통이 편리해지다 보니 관광지의 숙박시설들도 문을 닫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굳이 관광하고 현지에서 숙박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당일치기가 가능해지면서 관광 관련 상가들도 폐업으로 치닫고 있다.
빈 상가만 늘어나는가. 아니다. 지방 소도시 같은 데는 고령화, 청년탈출 등으로 인해 빈집들도 늘어나고 있다. 주인이 떠난 지 오래된 빈집들, 짓다 만 오래된 건물들은 칡 같은 덩굴 식물들이 주인이 없는 새 침입해 들어와 집과 건물을 휘어감고 있다.
마치 구렁이가 먹이를 삼키려고 하는 것처럼. 시인 기형도는 노래한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빈 집’ 일부)
상가를 열어놓고 활력을 구가하던 시대는 저물고 그 빈 상가에 가엾은 꿈도 갇혀 버렸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