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가현 아리타 언덕에서 ‘도산시비(陶山詩碑)’ 안내문을 보았다.
“1918년 당시의 니시마 츠우라 군수인 가시타 사부로가 이곳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았을 때의 아름다움과, 아리타 도자기의 당시의 융성을 「도산(陶山)」이라는 시로 읊었습니다. 1990년(평성 2년) 아리타의 서예가 가다오카 와다루가 글씨를 써서 비를 건립했습니다.”
이어서 ‘도산 시비’를 본다. 시비(詩碑)에는 가시타 사부로가 1918년에 지었다는 5언절구 한시가 행서체로 적혀 있다.
눈 아래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眼底家如櫛
가마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모락모락 窯煙起脚間
솔바람은 옛날부터 불어오는가 松風自萬古
이도조(이삼평)는 도산을 어루만지는구려 李祖鎭陶山
(조용준 지음, 일본 도자기여행 - 규슈의 7개 가마, 2016, p 221)
마지막으로 ‘도조 이삼평 비’를 보았다. 역시 일본어, 한글, 영어로 되어 있다.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공은 조선국(현재의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 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삼평공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후 귀화하여 출신지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가나가에라고 지었다.”
여기까지 읽다가 필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를 쓴 유홍준처럼 울화가 치밀었다. 이삼평이 임진왜란때 왜군에 부역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공식적인 기념비에 쓰다니. 역사적 사실 기록에 ‘추정된다’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사실 이삼평(李參平 미상~1656?)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출생지는 어디인지, 언제 일본에 끌려왔는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사망연도도 1656년인지 1655년인지 불분명하다.)
우선 출생연도부터 살펴보자.
이삼평의 출생연도는 미상이다. 출생지도 여러 설이 갈린다. 유력한 출생지는 충남 공주로 추정되어 1990년 10월 6일에는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 33-1번지에 한일합동기념비가 세워졌다. 그가 금강(金江) 출신인데다 아리타 지역의 초기 도편들이 공주 계룡산 가마와 같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두산백과도 ‘1990년에는 고향인 충남 공주시 반포면(反浦面)에 한일합동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적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론(異論)이 있어서 김해설과 남원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1536∽1618)가 1597-1598년 정유재란 때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까지만 왔기 때문에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1 규슈, p 142-143)
한편 이삼평이 언제 일본에 끌려 왔는가? 이 또한 1597년 정유재란 이전 설과 정유재란 이후 설이 나뉜다. (유홍준, 위 책, p 140-144)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부대에 소속되어 가토의 군대 1만 명보다 2천 명 많은 12,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출정하였다.
또한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1월 29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편지를 보내 포로를 잡아서 자기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2014년 3월부터 5월까지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전시된 「난세에서의 편지」 기획전의 편지와 설명문을 읽어보자.
“조선인들 중에 세공, 자수기술자, 바느질 잘하는 사람, 그리고 손재주가 뛰어난 여자가 있다면 내게 진상하라. 내가 일을 하게 하겠소. 집집마다 수색을 하여 그들을 잡아오시오.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은 수많은 조선 남녀를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고, 이들 중에는 아리타 도자기와 가라쓰 도자기를 만든 도공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데요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데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오네는 포로로 잡혀 온 궁녀들을 곁에 뒀고 이 편지가 쓰였을 때부터 그녀가 죽을 때 까지 30년간 그들을 신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