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이 하는 말씀에 ‘입동 전에 보리 묻어라’는 말이 있다. 입동이 오기 전에 보리 씨를 땅에 묻어야 제때 싹이 터서 보리농사를 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가을걷이를 마친 벌판은 다 비어 있으나 낙엽이 지는 늦가을에 보리농사는 시작된다.
보리는 입동 전에 씨를 뿌려주어야 겨우내 땅속에서 충분히 성숙기를 가지게 된다. 올해는 지난 11월 7일이 입동이었다. 아직 가을이 머물고 있는데 절기는 기온이 크게 내려 성큼 겨울로 가고 있다.
월동 준비로 바쁜 농촌에선 일손이 모자랄 때이지만 흙먼지가 날리더라도 반드시 입동 전에 파종하라고 한다. 만일 입동 후에 보리 씨를 묻으면 땅이 얼어 보리싹이 안 나올 수도 있고 나오더라도 시원찮을 수 있다. 보리를 기르는 하늘과 땅의 합작 사업에 지장이 생긴다는 뜻이다.
‘입동 전 송곳 보리’라는 말도 있는데, 이 말은 입동 전에 보리싹이 송곳 길이로 자라야 이듬해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월동 전에 보리잎이 두 개밖에 나지 않는 경우 농사가 잘될지는 이듬해가 되어야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다른 어떤 지역에서는 보리잎 두 개는 겨울을 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말도 있다. 남쪽과 북쪽으로 약간의 시차가 있어서일 것이다. 어쨌거나 파종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겨주는 말들이다.
성서는 씨를 뿌리는 때가 있고, 거두는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살이가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을 정복하느니 하지만 다 허사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속에 살아가는 엄한 법도가 숨겨져 있다.
인간이 내세우는 과학 문명이란 것도 그저 자연의 작동 법칙을 찾아내고, 그 법칙을 활용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데 불과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아무리 인간이 무엇인가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만들어낸다고 한들 다 자연의 법칙 안에 있는 것들이다.
화가 샤갈은 자연을 또 다른 성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자연을 잘 독해하면 모든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는 것을 짐작했다. 자연의 법칙, 법도에 따라 세상 만물이 움직인다. 어느 것 하나도 예외가 없다. 자연이야말로 도덕이요, 윤리요, 법칙을 가르쳐주는 경전이다.
사람이 무엇을 해보겠다고 용을 쓴들 자연을 거스를 수가 없다. 세상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자식들이다. 당연지사로 인간도 그 범주 안에 있다. 나는 두 달째 매일 맨발 걷기를 하고 있는데 걸으면서 대지가 발바닥에 닿는 그 느낌이 신성하기까지 하다. 발바닥으로 맨흙을 밟고 걷는 그 시간은 흡사 교회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는 느낌이다. 나를 내보낸 대지에 한없는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라고 할까.
나는 유년 시절 말고는 맨발로 걸어본 기억이 없다. 맨발 걷기를 하면서부터 자연과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맨발로 땅을 걸으면 몸 안의 활성산소가 빠져나가서 좋다느니 하는 그런 소문보다는 어릴 적 맨발로 진흙땅이나 밭고랑 사이를 걸어본 기억을 되살리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어릴 적에 어머니는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방바닥에 엎드려서 등짝을 두 발로 밟아달라고 하실 때가 있었다. 어머니의 다리며 허리를 꾹꾹 밟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연신 ‘시원하다’라며 반겼다. 맨발 걷기를 하노라면 거꾸로 대지가 내게 기운을 뿜어 올려주는 것이 아닐까. 마치 땅이 높은 나무우듬지까지 물을 밀어 올려주듯이.
두 다리가 아직 성할 때 부지런히 걸어서 몸을 튼튼히 할 일이다. 보리 씨는 입동 무렵에 싹을 내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푸른 싹을 키운다. 눈 속에 파묻혀서도 푸른 기운을 북돋는다. 겨울에 자라는 보리를 생각할 때마다 탄허 큰스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한겨울 절간으로 뵈러 갔을 때 큰스님은 불쑥 물으셨다.
“지금이 봄이요? 겨울이요?” “큰스님, 절 마당에 눈이 하얗게 내렸습니다.” “밭에 가서 눈을 치우고 푸른 보리를 파보시오.” 큰스님은 지금은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올 때란다. 봄이 시작된다는 말씀이었다. 꿩이 알을 품고 있듯이 겨울이 봄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놀랍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