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사람 박영란>
'불굴의 전사’넘어 '인권'위해 혼신한 사람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가 의사가 됐다는 소식은 서설과 같았다.
지난달 16일 그가 제68회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는 뉴스가 타전되자 인터넷에서도 ‘따뜻한 축하’가 잇따랐다.
불행한 시대를 만나 ‘간첩 죄’를 뒤집어쓰고 장장 14년동안 옥살이를 했 던 ‘최연소 장기수’를 기억하는 네티즌들은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천천히 길게 가시기 바랍니다. 흐미 좋은거….” “강용주를 기억합니다. 그 사람 공판에 갔었거든요. 나중에 나오는 것도 봤고…서울에 무슨 일로 갔는데 지하철 구멍 빠져나오느라고 고생했다는 기사도 읽었고…이번에 시험 들었다는 것도 알고…그리고 너무나 고맙습니다. 고 양반이 나중에 병원 차리면 학생들 데리고 견학가렵니다”라고 기뻐했다.
‘노먼 베쑨’이나 ‘체 게바라’ 혹은 ‘프란츠 파농’처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강용주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은 1985년의 일이었다.
전남대 의예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강용주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고등학교 선배 양동화씨를 만났다. 강용주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궁금해 하는 선배에게 ‘민주화의 길’ ‘민주노동’ 등 공개 단체에서 나오는 자료와 ‘학생운동의 전망’‘아방 타방’등 학생운동 내부 자료, 광주항쟁의 역사를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타자본 등을 건네주었다는 이유로 ‘간첩단 사건’의 일원이 되었다.
1985년은 2. 12총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된 시기였다. 학생운동권 최초의 연대조직인 전학련, 삼민투가 결성됐고 미 문화원 점거농성 등 반미, 반정부투쟁의 수위가 높아졌다. 여론에 밀려 ‘학원안정법’ 제정을 포기했던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안기부는 강용주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에게 60여일간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물고문과 비녀 꽂기, 각목으로 성기를 내리치겠다는 협박속에서 ‘간첩단 사건’의 각본과 진술서가 작성됐다.
‘검찰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라’고 하고, 다시 질문해서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제대로 외울 때까지 쓰고 때리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학원에 침투해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선동한 빨갱이’임을 인정해야만 고문을 피할 수 있었다.
가공할 폭력앞에서 자신을 방어할 힘을 잃어버린 그는 2심 재판에서야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고문에 의해 강요된 진술’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백 외에는 간첩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스물 네 살의 젊은이는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고문-14년 옥살이-보호관찰...짓밟힌 영혼 극복
'5월 정신' 되살리는 사람들 가장 먼저 돕고 파"
법정에 가면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젊은 영혼’이 받은 상처는 깊고 깊었다. 더구나 그는 안기부의 협박과 방해 때문에 변호사의 조력조차 받지 못한 처지였다.
‘종신형’을 선고 받은 중압감, 고문에 못 이겨 친구와 선후배의 이름을 말했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그에게 당국은 집요하게 전향공작을 시도했다. 어머니를 통해 “전향서만 쓰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에서부터 파괴하는 야만과 타협할 수 없다. 내가 전향하면 날조, 조작된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고문과 폭력에 무너져 쓰레기통 속에 쳐박혀 버린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도 다시는 폭력과 강제에 굴복할 수 없다.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굴복해 전향하는 것은 열사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광주정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확신에 기초해 어떤 고난도 감내하고 싸우겠다“고 결심한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투옥된 지 14년만인 1999년 2월, 겉모습을 달리한 전향서나 다름 없는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은 채,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다.
새파랗게 젊은 날에 그토록 참혹한 고통을 당했으면 이제는 자유롭고 행복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강용주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출소후 7일안에 주거지, 교우관계 등 생활상과 여행, 모임 참석 등 신상 변동을 일일이 신고해야 하는 보안관찰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이미 처벌을 받았는데도 단지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하고 감시의 족쇄를 채우는 보안관찰법에 불복종했다.
2001년 11월 그는 보안관찰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돼 불구속 기소됐고 이듬해 벌금 100만원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해 50만원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패소했다. 2002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 ’보안관찰처분 취소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역시 패소했다.
‘양심의 자유’를 지켜 내기 위한 힘겨운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소중한 결실’도 있었다.
2003년 7월15일 유엔 인권이사회가, 그가 1998년 5월 제출한 개인통보에 대해 “사상전향제도(준법서약제)가 국제 인권규약(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B규약)에 위반되므로, 국가가 피해자 배상을 포함한 효과적인 구제와 재발 방지 조처를 취하라”는 결정을 채택한 것이었다. 한국은 1990년 국회비준을 통해 이 규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결정에 대한 조처 결과를 90일안에 유엔 인권이사회에 통보하고, 관보에 게재해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까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의사 국가시험을 하루 앞둔 지난달 7일에도 강용주는 2년간 ‘보안관찰 처분’을 갱신한다는 결정서를 받았다. 우습게도, 결정서에는 그의 ‘보안관찰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맡았던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였던 강금실 법무장관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지난 1월말, 광주의 한 식당에서는 강용주의 의사고시 합격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날 모임에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14년동안 함께 투쟁했던 어머니 조순선 여사(79)가 함께 했다.
“어머니가 있어 강용주의 오늘이 있다”고 인사를 건네는 지인들에게 그의 어머니는 “우리 용주가 의사가 되니까 기분이 정말 좋기는 좋은데, 나는 우리 용주가 의사가 되어도 옛날에 가졌던 그 마음을 잊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일순 가슴이 훈훈해졌다.
강용주는 “의사가 되고 나니,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고전적인 명제가 다시 떠오른다. 의사가 된 후에도 초발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돈을 벌면 ‘5월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돕고 싶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 잰 걸음으로 전남대 캠퍼스를 누비던 그와 안동교도소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창백한 얼굴을 기억하는 나는 강용주가 이 약속들을 지킬 것으로 기대한다.
‘악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악법의 또 다른 협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불굴의 전사’라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한 사람의 노력에 힘 입어, 우리는 또 ‘한 자락의 자유’를 얻게 되리라.
강용주는… 62년 광주출생으로 동신고교 3년이던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겪었다. 당시 19살 고교생 신분으로 시민군으로 참여해 항쟁의 마지막날 새벽까지 도청을 지켰다. 하지만 계엄군의 도청진입시 탈출, 이후 그 충격으로 고교를 자퇴했다. 이듬해 재입학해 졸업을 마치고, 전남대 의예과에 82학번으로 입학. 2학년 재학중 휴학하고 광주시 광천동 소재 금속공장에서 공원 일을하고, 전남화순군의 탄광에서도 잡부로 일하며 사회현실을 체험한다. 84년 복학 뒤 전남대 민주화투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85년 9월 안기부가 발표한 이른바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 국가보안법 위반(국가기밀누설죄)으로 기소되어 김성만, 양동화, 황대권 씨 등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구형됐다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 받아 긴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김영삼정권이 들어선 93년 형량이 20년형으로 감형, 98년 준법서약서를 쓰면 8.18특사에서 풀어주겠다는 당국의 제안이 있었지만 "양심을 거스를 수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그에겐 '세계 최연소 장기수'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는 결국 99년 2월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은 채 형집행정지로 14년만에 출소, 이후 전남대 의대에 복학해 의학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동시에 출소이후까지 자유를 옭아매는 보안관찰처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
저작권자 © 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