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석 시조시인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손대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홍랑 (?~?)
* 한국문학의 한 코드는 이 ‘기생’이라는 존재에 있다. 또한 시조가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근본에는 기생들의 시조가 있다. 사대부들의 시조만 있었다면 시조는 그 이념적 신분적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현대시조로 잇게 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기생들의 시조가 메워줌으로 해서 시조는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조 전문을 한글로 써서 연인 최경창에게 전한 홍랑 시조의 원본에서도 그 일례를 확인할 수 있듯이 기생들은 한글문학의 선구자들이기도 하였다.
모든 기생이 다 그러하였다고 말할 수야 없지만 시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기녀들의 사랑은 각별하였다. 삶 자체가 사랑인지라 스스로 제사랑에 진솔하였으며 온몸 온맘 온뜻으로 사랑한 사랑의 사람이 기생이었다.
'기생'이라기보다는 예인이었고 사대부들을 뛰어넘는 시인이자 탁월한 평론가였다. 문화의 보존자요 그 자신이 문화였다. 어찌보면 이는 기묘한 결과이다. 사대부들의 시조가 그들의 시조가 아닌 말하자면 천민의 시조가 되는 순간이니 더욱 그렇다. 사대부들의 문학적 여기를 위해 요구된 것이 '기생'들이었지만 우리문학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하나의 문학적 숨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기생들'의 눈물과 한숨으로 빚어진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그 문학적 삶에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기생들’의 삶이야말로 그 숙명적 틀에 연연함이 아닌 그것에 맞서는 정신이 있었다는 측면에서 시조의 시형을 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황진이의 그늘에 가려 다소 그 주목을 받는 바가 덜한 듯하나 홍랑의 시조는 황진이 못지않게 빼어나다. 이 시조 한 수에 그녀의 삶 전부가 그녀의 존재 전부가 아늑히 안겨 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이 시조의 상황 설정은 눈여겨봄직하다. 창 안(방 안)과 창 밖(한데)의 구도를 설정하여 '밤비'(이별의 슬픔 속)에도 돋아나는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 시조의 힘이다. 이별의 상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소생적 힘이 있다.
'밤비'에도 '새잎' 돋우는 사랑이 홍랑의 사랑이다. 그러한 마음이 묏버들 중에서도 고운 것만 골라내어 님에게 주고자 하는 심결이다. 자신의 심결 중에 소중한 것 진실한 것만을 주고자 하는 정성어린 마음을 가만가만 안치고 그 위에 끓어넘쳐 여물어가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이었으니 칠주야를 걸어 님을 찾고 자신의 얼굴을 훼하면서까지도 님의 묘언저리를 머물러 지킨 초인간적 사랑이 아니었겠는가. 마음과 몸의 일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시적 감동은 시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시 밖에서 시 안으로 흐르는 것이다.
/김주석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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