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眞景)을 찾아가는 더딘 걸음
진경(眞景)을 찾아가는 더딘 걸음
  • 범현이
  • 승인 2009.09.25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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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전시로 소회가 남다른 작가 최진우(41)

▲ 최진우 작가.
프롤로그

늦은 밤, 보내져 온 메일을 확인하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한다. 전시회를 알리는 내용의 첨부파일을 확인하며 <무등전도1>이라는 그림에 한참동안 눈길을 떼지 못한다.

작가는 민족미술협의회 5월전 뒤풀이에서 이미 낯이 익은 얼굴이다. 곱슬한 긴 머리털. 까만 턱수염으로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내 아이가 다녔던 학교의 교사였다. 담임을 맡거나 교과목을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민미협에서 반가운 수인사를 하면서 교사였던 것을 알았다.

약속시간을 정하고 아이가 다녔던 학교를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간다. 주차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미 웃고 있었고 우리는 교무실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품은 액자 제작으로 인해 액자공방에 이미 가 있었고, 작품을 보는 대신 방금 나온 도록을 받았다.

그림을 그리며 작가로 이미 알려져 있지만 이번 전시가 첫 전시인 작가는 “1999년 작고하신 아버지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키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 무등전도1, 한지에 수묵담채, 53cm×86cm, 2009
우리 땅과 우리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

대학시절 작가는 ‘광주 전남 미술인공동체’에 몸을 담았다. “고등학교 때 왜, 대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고 데모만 할까하는 생각을 했었고 순천에서 광주로 유학 오는 내게 데모하지 마라는 말을 무수히 어른들이 했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대학에 들어와 만나는 사회는 녹록치 않았다. 그동안 내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한없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결국 진실을 찾아가는 여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 입학식 날, 내가 만난 것이 고 박종철 열사의 49제였다. 나는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데모장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채화로 대학을 입학 했으나 한국화로 개인전을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나하나씩 역사의 진실을 알아가면서 작가는 우리의 덮어져 버린 역사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자신이 그려온, 혹은 앞으로 그려가야 할 그림의 원류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에서 대안을 찾기에 이른다.

“대학원 석사논문을 <금강사군첩>으로 본 단원 김홍도의 실경산수 구도와 시점연구'로 정하면서 단원에 대해 더 깊이 만날 수 있었다. 화첩에 그려진 강원도 지역을 직접 발로 걸어 다니며 그림과 실제의 경치를 하나씩 맞춰가는 작업을 했다. 200년 전의 김홍도의 체취를 모자이크를 해가며 느껴갈 수 있었고, 실경을 그려내는 방식과, 필법 등을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었다.

또, 동시대 선배화가였고 진경산수화를 완성시킨 겸재 정선 또한 내 그림의 중요한 스승이 되었다. 특히 <금강전도>의 구성방식과 진경 정신은 이 시대에 다시 이루어야 할 목표로 생각했고, 그것이 화두가 되어 이번 개인전의 주제인 <무등전도>시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 노송, 한지에 수묵, 93cm×55cm, 2007

▲ 아버지 초상, 한지에 수묵채색, 52cm×86cm, 1999
더딘 걸음으로 첫 개인전을 열다

“사실 1999년에 개인전을 열 준비를 했었다. 결론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1999년에 작고하신 아버지의 유언을 이제야 청개구리처럼 지키는 셈이다”

맞다. 개인전을 준비하던 작가는 아버지의 병 구환을 하면서 열지 못했고 그 대신 교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꿈을 이루었다. 작가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을 수 없다 “교사가 되어서 편히 살길 원했는데 그림 그리는 것이 좋다면 어쩌겠냐. 앞으로 그렇게 해라”는 유언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마음 안에 스스로 졌던 빛을 덜어낸다.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가 마음을 다해 선보이는 작품은 대략34점 정도이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을 총망라했다. 미처 선보이지 못한 작품에서부터 이제는 자리를 잡은 나름의 <무등전도>시리즈까지. 작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직은 남아 있지만 천천히 더딘 걸음으로 하나하나씩 풀어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 다짐, 한지에수묵담채, 96cm×121cm, 1997
1997년 작인 <다짐>을 보면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분신한 박승희 열사의 기념사업에서 일하던 작가는 작업한 그림인 <외침>을 열사의 집에 기증하기도 한다. 나름의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박승희 열사의 5주년을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은 당당히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결심이 아닌듯 싶을 정도로 견고한 이미지다. 무등을 바라보며 스스로와 하는 약속. 이 땅을 살아가는 작가가 당연히 해내야 할 사회적인 몫.

지나간 시간, 오는 시간까지 아우르다

한없이 기대어 한 무더기 속절없이 살아왔다. 무등을 바라보며 살아온 젊은 시절을 이제는 오히려 작업 안에서 무등을 껴안는다. <무등전도>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눈에 비치는 무등산은 진경이다. 삶이 살아 숨 쉬고 역동 치는 시간이다. 이 전부터 현재, 미래에도 많은 우리 자신들이 오르고 내릴 삶의 현장이다. 자신을 버리고 다시 얻어가는 삶의 시간들이다. 작가는 진경을 그리면서 진경 안에 삶의 진경까지 담는다. 한꺼번에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차근차근, 느리게 산의 오밀조밀함을 꼼꼼히 살펴가며 사람들의 삶과 어울리게 혹은 버무리며 담아간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무등전도에 담아내기 위해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화구를 들고 산을 오른다. 직접 발로 걸으며 이 땅의 체취를 확인하고 느끼며, 보이는 구석구석에 마음을 담아 전경을 완성해나간다. 길을 그리고, 그 길을 땀과 함께 오르는 우리들 자신을 그리고, 무등 만이 안고 있는 산화해버린 한(恨)도 채색한다. 무엇 하나도 허술하게 놓칠 수 없어 작가는 늘 열려있는 마음으로 다가서서 무등을 바라본다.

▲ 겨울무등산에서, 한지에수묵담채, 148cm×53cm, 2000

“진경을 찾아가는 작고, 더딘 걸음이다. 무등을 오르며 정선의 금강전의 위대한 조형성을 재발견한다. 금강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등산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스스로 학습하고 있는 나를 본다. 걸어 다니면서 비로소 세상을 바라본다”

▲ 나무아래서, 한지에수묵담채, 55cm×93cm, 1999
1999년 작인 <나무 아래서>에는 소나무 아래 앉아 턱을 괴고 쪼그려 앉아 쉬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무작정 애정이 간다. 잠시 쉬어가는 생애는 소나무다. 우리는 모두 소나무 아래 앉아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진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시간들인지. 작가는 그림으로 화답한다. 겨울 무등산을 오르며 답을 찾아간다. 삶의 능선이 완만하던, 견딜 수 없이 가파르든, 태어난 이상 산의 능선을 오르는 일이 전부라고. 다시 내려오는 일이 반복 되더라도 끊임없이 시지프스 왕처럼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고.

일시 : 9월29일(화)까지
장소 : 서울 종로구 인사동 라이트 갤러리
문의 : 010-5613-3114

에필로그

너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 너와 너 아닌 것을 / 나와 나 아닌 것을 /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날들과 죽어도 죽어 있지 않은 날들 속에서 - 너는 어떻게. 詩이상희.

세월이 이따금 묻는다. 내가 가졌던 모든 것과, 가지려고 했던 모든 것 사이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말없이 놓여 있던 작았으나 견고했던 마음들을.

머리에 등불이 켜지고 가슴에 불빛이 죽는다. 마음 속 백가지 색을 지우고 지우니 백지가 된다. 깊은 상처의 길이 사라지고 빈 집에 굶주려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 하나, 그 아래 누워있다. 답답한 가슴에 못을 치는 소리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난 모든 길을 다 따라가 보진 않았다.

삶의 태엽을 감는다.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다. 가는 곳까지만 길일 뿐.

제발 그러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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