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개혁은 차기 정권 과제 중 첫 자리
‘박근혜 탄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정치권은 조기 대선으로 내달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미묘한 기류가 대두되면서 또 국민은 들러리로 내팽겨 쳐질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늘 그렇듯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는 건 아닌가?’ 심히 우려스럽다.
대권을 꿈꾸는 소위 잠룡들의 행보와 정당들의 손익을 노리는 계산에서 그런 조짐이 읽히고 있다. 그러니 적어도 정치에 대한 얘기라면 절대로 점잖은 언어나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한국정치이다. 한국에서 가장 타락하고 추악한 집단이 정치집단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글을 읽지 않아도 좋다.
정당이야 당연히 정권창출이라는 존재이유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만, “지금의 탄핵정국이라는 이 판을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만들었나”라는 물음에는 “아니올시다”다. 오직 국민이 만든 것이다. “국민은 개돼지”라는 그 민중 말이다.
이제 그 과실을 따먹기 위해 이합집산의 손익계산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일부 잠룡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의 일은 종국에는 모두가 정치로 귀결되는 것을...
손익이란 말이 나왔으니 『주역』을 빌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역』에는 손괘(損卦 ䷨ )와 익괘(益卦 ䷩)가 있다. 이는 소위 서로 간에 도전괘라 하여 내 쪽에서 볼 때 익괘이면 맞은편에서 보면 손괘로, 서로 반대편에서 마주치게 되는 괘이다. 그러나 이는 이익이 있고 손해가 따르는 문제를 우리의 일반적 사고 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이해타산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백성이 이익이냐, 집권층이 이익이냐’라는 문제로 접근한다.
즉 아래를 덜어서 위에다 보태는 것이 손괘이니, 이는 백성의 것을 가져다 위에다 채워주는 것이다. 반대로 익괘는 위의 경대부의 것을 덜어서 아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다. 오늘날의 조세제도이고 사회보장제도이다.
공자가 『주역』을 읽다가 손․익괘에 이르러 “정치의 요체가 여기에 있다”며 무릎을 치고 찬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손․익의 논리와 교훈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를 하다보면 백성에게 이익을 주고자 시행한 것인데도 도리어 손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손해를 입히고자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익을 주는 경우도 있게 된다. 이 이해의 상반된 결과는 결국 화복의 문호(禍福門戶)가 되는 것인 바, 모름지기 정치인은 이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공자는 충고한다.
지금 대권을 꿈꾸는 이들과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치인들 중에 과연 몇이나 백성에게 미칠 손익을 생각해서 움직이고 있을까? 심히 부정적이니 우리 촛불은 이를 눈 부릅뜨고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에게 돌아오는 이익 보다는 그들의 정권놀음으로 전락할 개연성이 절대적으로 많아서 늘 걱정이고, 우리 역사는 언제나 예외 없이 그리 흘러왔다는 사실에 대해 과연 우리 국민 중에서 동의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우선 이 촛불정국에서 느끼는 문제로는 온 백성이 들고 일어나 “이것이 나라냐?”고 통탄하고, 언론이나 검찰과 특검의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로만 봐도 하늘이 무너질 일인데도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양심과 도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시비선악의 개념이라고는 없는 인간 말종에 가까운 이들 같아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다.
이게 모두 교육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같이 모여 3년, 6년을 공부하는 친구가 모두 경쟁의 대상이요, ‘너 죽고 나 살자’는 교육환경에서 자랐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그리하고 나서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는 이런저런 수단과 방법으로 출세를 하게 되면 거기에 부나방처럼 달라붙어 새로운 카르텔을 형성하여 국민과 나라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불법과 편법을 다 동원해서 이익을 나누니 죽어나는 건 ‘국민, 아니 개돼지’가 아니겠는가?
어느 한 순간에 밝혀지기 시작한 이 엄청난 박근혜 게이트라는 헌법유린 앞에 국민은 또 분연히 일어나 적폐를 해소해 보고자 하지만, 그 이해를 쫒아서 정치인 집단, 정치엘리트(?)들이 또 말아먹지 못해 안달인 정치하이애나들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그 계산에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덤비니 이는 오직 국민만 고달프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당면한 문제는 단연 ‘개헌’이다. 이게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 지금의 모든 적폐는 그들 정치인이 저질러 생겨난 일임에도 제도 탓, 남 탓으로 돌리고 개헌을 꺼내서 이익을 취하려 하고 있다. 개헌은 반드시 해야 하나, 지금 당장은 아니다. 모든 후보가 개헌을 공약의 제일로 내 세울 것을 국민의 이름(춧불)으로 요구해야 하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지지도가 안 오르는 것 때문에 이합집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원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니, ‘분권형’이니 하며 기존 헌법체제의 모순을 거들먹거리는데, 이 모두가 사람의 문제이고 정치엘리트들의 양심과 도덕성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지 어찌 제도를 탓하고 있는가? ‘의원내각제’를 하여서 의회에서 총리를 뽑는다 한들, 그 이합집산은 국민이 눈뜨고 보기 힘들 일이고, 그 손익계산과 이해타산을 국민이 다 떠안고 가잔 얘긴가?
또 같은 민족이자 하나의 국가로 70년이 넘도록 유지되어온 북한정권과도 서로 속고 속이며 또한 이용하며 화해와 협력이라는 틀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 정치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해 왔다. 국민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려는 극우집단의 ‘종북’이니 ‘좌파’니 하여 편가르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의원내각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직은 우리에게는 ‘대통령중심제’이다. 그것도 반드시 중임제여야 한다는 뜻이다. 좌우 이념의 대립이 국민을 위한 학문적 철학적 정치적 정책적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살기의 왜곡이 난무하는 대립적 갈등 속에서는 오직 대통령제만이 그나마 최선의 수단이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헌문제는 새로운 정부의 핵심목표로 두되, 사회 각계각층의 충분한 논의와 토론을 통해 여유 있게 결정해야할 문제이다. 여론 지지를 바탕으로 ‘개헌특위 위원회’를 범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서 논의해야 하며, 이에 정치권은 한 축이어야 하지, 그들이 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건 국민이 다 안다.
사실 개헌보다 더 큰 문제는 전혀 다른 데에 있다. ‘국가정보원’. 이 사회의 모든 적폐의 시작과 끝인 ‘국가정보원’의 개혁에 있다.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는 모든 개혁론이 공염불이 될 것이다. 단순히 업무의 축소나 조정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혁이라야 한다.
국정원 개혁은 촛불에서도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차기 정권에서는 반드시 실현해야할 과제중의 첫 자리이므로, 이를 대권 후보들에게 요구해야 하고, 이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후보를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국민이, 민중이 더 이상 개․돼지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리되면 검찰개혁도, 최후의 귀결점인 정치개혁도 자연히 따라가게 되어 있다.
벼룩이 자기 키의 50배를 뛴다고 하는데, 그 “벼룩 한 말을 몰고 가는 것 보다 정치인(국회의원) 세 명 몰고 가기가 더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그들과 얽힌 이 사회의 모든 시스템, 특히 언론을 어찌 할까 만은, 이 모든 시스템의 정점에는 분명히 국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국민이 대신할 수 있을 때에라야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조그마한 잠룡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간 감언이설로 개헌을 주장하며, 이합집산을 노리는 속임수 앞에서 촛불은 더 밝게 타올라야 할 것인데 걱정이다.
촛불에는 아쉽게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아젠다가 없고, 로드맵이 없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아쉽다. 세상에 존경받는 원로가 지금만큼 아쉬운 적이 있을까? 안정되고 품위 있는 사회나 나라에는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원로’가 있는데, 우리 사회에는 없어 보인다. 눈물겨운 일이고, 이것이 그 사회의 기준인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원로집단에서 세상을 이끌 등불이 되어 민중을 리드해 준다면 우리는 이보다는 덜 혼란스러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고, 정치집단들의 감언이설도 덜할 것이다.
다음으로 정권에선 국정원의 개혁과 학교교육에 대한 개혁이 가장 큰 과제가 되어야 하므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개혁의 지도자가 나와 주기를 바란다. 아니 촛불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로 키워야 한다. 그런 정책을 내어 놓은 지도자에게만이 다음 정권을 맞길 수 있다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놓고 또 설왕설래다. 늘 있어온 문제이지만 재벌의 불법이 문제 될 때마다, 또 선거 때마다 국가경제를 빌미삼아 개혁을 막고 빠져나가게 하는 이 사회 기득권집단의 음모가 있어 왔다. 이에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언제나 부화내동하며 기득권을 누려왔다.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반드시 엄단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는 나라의 참경제를 위해, 국가경제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부연하자면 기업인이야 이익을 쫒아 내달려야하는 특성이 있어 불가피한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정치인은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운위하면서 온갖 특권은 다 누리고 사는 집단이다.
필자는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어느 시민단체의 이름으로 국회의원들의 상임위 의정활동에 대한 의정평가를 몇 해 동안 한 적이 있다. 그때 느낀 소감을 딱 한마디로 말하라면 “아! 이 나라 백성은 생선가게를 통째로 고양이(국회의원)에게 맡기고 살고 있구나”였다.
그래서 국회의원이야말로 3선까지만 허락하는 입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확고한 신념으로 가지고 있다. 모든 선출직에 제한규정이 있는데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 자기들만 제한이 없다. 세상에 이 보다 더한 특권이 어디 있으며, 이 사회 최상위 특권집단임을 알면 좀 양심이라도 갖추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내일을 열어 가는데 한 생명 다하는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다.
끝으로 이처럼 정치인들은 좋은 말로 ‘정치엘리트집단’이지 정치깡패집단에 다름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탄생하는 정당,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면 이름만 바뀌는 정당, 떨어져 나가 분당하여 마치 새로운 정치집단인양 새 당명으로 옷 갈아입는 정당들로 바뀜에도 국민의 입장에서야 어쩔 수가 없다.
나라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이 ‘정치집단’은 버릴 수도, 없앨 수도 없어서 문제가 아닌가? 필요에 따라 옷 갈아입고 ‘나요 나요’하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 중에서 선택하고 골라야 하는 국민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임에도 참정권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