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가슴새의 선택
진홍가슴새의 선택
  • 문틈 시인
  • 승인 2018.07.04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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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가슴새는 철새다. 겨울이 오면 따뜻한 곳으로 날아간다. 우리에겐 흔히 개똥지빠귀로 알려진 새다. 전설에 이 새는 예수의 이마에 박힌 가시들을 부리로 하나씩 빼내다가 이마에서 흘리는 피에 젖어 가슴이 붉어졌다고 한다. 진홍가슴새(robin redbreast)로 불리는 연유다.

겨울이 오면 진홍가슴새의 10퍼센트 정도 되는 새들이 날아가지 않고 눌러 앉는다. 눌러 앉는 새들은 겨울이 견딜만하게 따뜻할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다행이지만 기대가 어긋나면 얼어 죽는다.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남는 새들에게는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새들이 목숨을 걸고 겨울에 남는 절실한 이유가 있다.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날아갔던 새들이 돌아오기 전에 최적의 장소에 둥지를 틀 수 있다.

해마다 둥지를 틀 자리가 모자란 탓에 미리 자손 번식에 유리한 둥지를 틀기 위해 대모험을 하는 셈이다. 후손을 번식하기 위한 둥지 차지에는 이토록 생사를 건 처절한 모험이 있다.

겨울을 피해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간 새들은 돌아왔을 때 마땅히 둥지를 틀만한 곳이 모자라 난관에 봉착한다. 돌아왔는데 둥지를 짓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삶 가운데서 늘 직면하는 딜레마다.

따뜻한 곳으로 날아간 새들과 겨울 속에 눌러 앉은 새들 중 어느 편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판단할 수 없다. 따뜻한 곳으로 날아간 새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남아 있는 새들은 운이 좋으면 자손을 남길 수 있고 그 반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상황은 안전을 추구하는 보수와 도전을 향하는 진보에 비유할까.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 해석으로는 어느 쪽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옳고 그름은 세월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땐 ‘후테이센진(不逞鮮人: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으로 찍히면 무지막지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해방 후에는 ‘빨갱이’로 지목되면 대대로 출세를 못하고, 6.25 전란시기엔 ‘반동’(공산당에 반대)으로 몰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시대를 겪어왔다.

요즘 진홍가슴새 이야기를 삽화로 그린 어느 노르웨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히틀러가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스탈린의 공산주의 위협 앞에 놓인 노르웨이 청년들은 나라를 위해서 히틀러군에 입대하였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렇게 쓴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런 틀린 생각이오. 옳고 그름의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오.’ 작가의 말대로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다.

국가를 위해 히틀러군에 입대한 노르웨이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매국노 신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레지스탕스에 뛰어든 사람들은 영웅소리를 듣게 되고.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13 지자체 선거 압승 소감에서 ‘진보로 대한민국 주류 교체’를 선언했다. ‘친일파에 기반을 둔 보수를 퇴출’하고 한국의 정치 주류 세력을 교체하겠다는 정치 비전을 언명한 것이다. 노무현표 ‘기득권 세력의 교체’의 추진으로 읽힌다. 지금 절대다수는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시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말 그대로 진보가 주류로 교체되는 과정으로 보인다. 국민의식의 판갈이도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 거친 현대사의 몇 고비들을 넘기며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은 이 국면에서 때로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대신 자유란 표현을 빼고 민주주의로 바꾼 것 같은 것이 그렇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교과서에서 왜 자유를 빼는지 모른다.

시인 김지하가 유신헌법이 국민을 옥죄던 암울한 시기에 쓴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에서 ‘신 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라고 피맺히게 노래했다.

시인의 민주주의가 자유를 뺀 민주주의와 같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곳곳의 분야에서 워낙 빠르게 바뀌고 있어 냉큼 적응하기가 쉽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라고 하는 개체보다는 사회 공동체가 더 강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양한 분야에서 과거의 행태가 척결되고 있고 ‘신사고’(新思考)가 요청되고 있다.

훗날 역사의 심판대에서 무엇이 옳은 것이 될지는 우리 같은 범인들은 알 수가 없으므로 ‘바람보다도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빨리 일어나는’(김수영) 풀처럼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이다. 정의를 고수하며 산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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