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를 엎고 쾌도난마(快刀亂麻)와 같이 개혁을 추진했다.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를 분쇄해 쇠락한 왕권을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침입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먼저 대원군은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 권한을 강화했다. 안동 김씨들을 쫓아내고 60년 넘게 유지해온 세도정치를 타도했다. 노론의 일당독재를 억제하고 소외되었던 남인과 북인을 기용했으며,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이어서 대원군은 기강확립에 나섰다. 수탈을 일삼는 수령방백들을 가려내 처단했고, 착복한 돈은 모두 받아냈다.
아울러 농민들의 원성인 삼정문란도 개혁했다.
전정(田政)은 놀고 있는 땅이라고 숨겨서 세금을 안 내는 땅을 찾아내어 세금을 물렸다. 또한 왕자와 옹주등 궁방의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군정도 개혁했다. 1864년 초에 대원군은 한평생 군역을 면제받은 양반에게도 군포세(軍布稅)를 내게 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장정에게 한 해에 2냥씩 받은 것이다. 이를 동포전(洞布錢)이라 했다. 이러자 백성들이 환호하였다. 반면에 양반의 불만은 컸다.
대원군은 환곡의 폐단을 막고자 1867년 가을에 팔도에 사창(社倉 미곡창고)을 설치하였다. 동네 단위로 창고를 마련하고 거기에 곡식을 저장하여 주민들이 관리하도록 했다.
이렇게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 기회가 막히자 백성들은 숨통이 트이고 국가 재정은 나아졌다. 1864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10년동안에 국가 수입은 금은 51%, 돈 225%, 베 673%, 쌀 165% ,콩 299%가 늘어났다. (이이화 지음, 이이화 · 한국사 이야기 17 –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열강, p 45-46)
대원군은 사치풍조를 막고 절약을 장려하는 정책도 폈다. 명주옷을 못 입게 하고 두루마기와 담뱃대의 길이도 줄였다. 소의 밀도살도 금지하고
서양 포목의 판매와 사용도 금하였다.
대원군의 개혁 중 가장 혁신적인 일은 서원 철폐이다. 대원군은 1864년 4월 22일에 대왕대비는 전국의 서원 실태를 조사하도록 전교하였다.
8월 17일에는 서원의 폐단이 심하니 우선 사설(私設)· 남설(濫設)을 엄금하라고 지시하였다.
서원의 폐단은 이미 역대 왕들도 체험한 바이며 철종 때에도 서원 단속을 지시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흐지부지 되었고, 사액서원 명목으로 오히려 증설이 되었다.
1865년 3월 29일에 대왕대비는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명령하였고, 1871년 3월 9일에 고종은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연전에 만동묘에 지내던 제사를 그만두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大報壇)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 도학(道學)에 관한 학문이 있고 충성과 절개를 지킨 사람에 대해 서원을 세워 중첩하여 제향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중략) 비록 사액한 서원이라고 해도 한 사람에 대해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된 것은 예조판서가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하여 신주를 모신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하라.(후략)"
(고종실록 1871년 3월 9일)
이리하여 전국적으로 47개소의 서원만 남고 600여 개소는 헐리게 되었다. 이러자 각지의 유생들은 분개하여 궐기해서 맹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대궐 문 앞에서 시위하며 탄원하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추호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정말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내가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포도청 군졸을 풀어 한강 바깥으로 유생들을 쫓아버리고, 지방 수령들 중에 눈치를 보는 자는 관직을 박탈하니 조선 팔도가 두려움에 떨며 일시에 서원이 철폐되었다.
이러자 지방 유림은 대원군을 ‘동방의 진시황’이라 비방했지만, 서원의 폐해에 시달린 백성들은 환호하였다.
(박은식 지음, 한국통사, 범우사, 1999, p 78-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