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고종 2) 4월 초에 대원군은 왕실 중흥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중건에 나섰다.
1865년 4월 2일에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전교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 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戰亂)에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 아! 마치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 ... 이것은 비단 조상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성의(聖意)일 뿐만 아니라 넓고도 큰 도량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의 복이며 국운의 무궁할 터전도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내 마음은 경사와 행복을 이기지 못하겠다.”
4월 3일에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의견을 들었다. 조두순·김병학은 대체로 찬성했으며 김좌근·정원용 등은 신중론을 펼치는 등 찬성과 신중론이 엇갈렸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 앞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이날 대왕대비는 영건도감을 설치할 것을 명했고, 도제조에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이 임명되었다.
사업을 위한 재원 마련과 부역의 원칙도 마련되었다. 첫째 백성을 부리는 일을 신중하게 할 것, 둘째 조정 고관부터 지방 수령 이하 모두 역량에 따라 재원에 보탤 것, 셋째 양반들은 자진하여 원납하는 자가 있으면 관작을 내리고 포상을 하며, 억지로 내게 하지 말 것 등이었다.
이러자 2일 동안에 서울에서 들어온 원납전(願納錢)이 10만 냥을 넘었고, 종친들도 수만 냥을 냈다. 대왕대비도 10만 냥을 내려보냈다.
4월 13일에 경복궁 중건 착공식이 있었다. 20일 동안에 35,000여명이 동원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역하는 사람들을 위문하기 위해 남사당패들을 불러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는 등 사기를 돋우었다. 일터엔 경기민요조 ‘경복궁 타령’이 울러 퍼졌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1866년 3월 6일에 공사장 임목장에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하여 가건물 800여칸과 쌓아 놓았던 목재가 전부 불타버렸다. 이 때문에 공사 중지설까지 나왔다. 그러나 대원군은 굽히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였다. 1866년은 천주교 탄압과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숭숭한 때였지만 공사는 진행되었다.
조급한 대원군은 목재 마련을 위해 양반들의 선산이나 마을 성황당의 나무까지도 베어내었으며, 원납전은 명목상 강제 징수를 금했으나 실제로는 기부를 강요했다. 자발적 기부라는 원납전(願納錢)은 원성이 자자한 원납전(怨納錢)이 되었다. 또한 대원군은 백성에게 결두전이라는 토지 부가세를 거두었고, 1867년 3월부터는 도성문을 출입하는 자에게는 문세(門稅) 즉 통행세도 징수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재원이 부족하자 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했다. 1866년 11월부터 금위영(禁衛營)에서 당백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여 1867년 4월까지 6개월여 동안 무려 1,600만 냥이라는 거액을 주조하였다. 실질 가치가 상평통보보다 5·6배에 지나지 않는 신화폐에 100배의 명목 가치를 부여한 화폐를 다량으로 주조·발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는 거액의 이득을 취해 긴급한 재정 수요에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시일 내 그처럼 다량의 악화가 시중에 나돌게 되자, 화폐 유통 질서가 큰 혼란에 빠져 버렸다. 상평통보를 가진 자는 당백전과의 교환을 기피 해 상평통보를 시중에 내놓지 않았다. 또 시중에서는 위조 당백전이 난무했다. 이렇게 당백전이 시중에 넘쳐나자 당백전 가치는 하락하고 물가는 폭등했다. 실물경제 대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급기야 조정은 1867년 4월 당백전 주조를 중단하였고, 1868년 10월에는 유통까지도 금지했다.
이렇게 경복궁 중건에 따른 원납전·당백전의 발행은 민폐를 초래했고 민심은 대원군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런 가운데 경복궁이 중건되어, 1868년 7월 2일에 고종은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법궁(法宮)을 영건(營建)한 지 겨우 40달밖에 되지 않는데 벌써 이어하게 되었다. 30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던 일을 이렇게 완공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1895년 10월에 경복궁에서 민왕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1896년 2월에 고종이 아관파천 한 후에 경복궁은 주인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