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3월 24일에 제3차 회담을 마친 이홍장이 숙소인 인접사로 가는 도중에 극우주의자의 총탄을 맞았다. 탄환은 이홍장의 왼쪽 광대뼈 아래를 뚫고 들어가 왼쪽 눈 밑에 깊이 박혔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총탄이 금테 안경에 맞은 것이 행운이었다.
이홍장의 피습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일본이 유연해진 것이다.
4월 10일에 이홍장은 회담장에 다시 나왔다. 이후 협상은 급진전되어 4월 17일에 청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1894년 4월 동학농민전쟁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8개월 20일 만이었다.
청나라와 일본간에 조인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 자주를 손상시키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완전히 폐지한다.
둘째, 청국은 요동반도·대만·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셋째, 청국은 전비 배상금으로 2억 냥(약 3억 엔)을 일본에 지불한다.
넷째, 청국은 일본에게 구미 열강이 청국에서 누리는 것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함을 승인한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는 붕괴되었다.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인 책봉-조공관계는 사라졌다.
그런데 조약 체결 6일 후인 4월 23일에 러시아가 주도한 독일 · 프랑스 3국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왔다.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이었다. 일본은 분노하였으나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 29일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 반도 반환을 결정했고 그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이후 일본에는 러시아에 대한 적개감이 고조되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본다는 뜻)’이라는 말이 번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군비확장에 주력하였다.
러시아의 기침 한 번에 일본이 독감에 걸린 것을 본 민왕후는 열강의 역학관계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민왕후는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척)을 추진했다.
5월 13일(음 4월 23일)에 고종은 친일파의 거두인 군부 대신 조희연을 파면하였다. 거일(拒日)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민왕후는 인아뿐만 아니라 친미도 추구했다. 5월 28일에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직하자 고종은 친미파인 학부대신 박정양을 총리대신에, 이완용을 학부 대신에 임용하였다. 이는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의 영향이 컸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살린 선교사 알렌은 박정양 · 이완용과 함께 워싱턴의 주미한국 공사관에서 근무한 외교사의 증인이다.) 그리하여 알렌은 8월에 노다지 금광인 평안도 운산 금광 채굴권을 획득했다.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p 162)
7월 6일(음 5월 14일)에 내부대신 박영효의 역모 사건이 터졌다. 박영효는 고종의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으로 도망쳤다.
음력 7월 3일에 고종은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민영순, 민형식, 이용태, 김문현, 조병갑 등 279명을 사면하였다. 민씨 척족을 다시 기용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민왕후의 입김이 컸다. 동학농민전쟁을 야기시킨 조병갑·김문현 ·이용태 등과 민영준·민형식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을 사면함으로써 고종의 이중성이 엿보인다. 더구나 민영준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병조판서를 한 역사의 죄인이었다.
음력 7월 5일에 고종은 김홍집을 다시 총리대신에, 박정양을 내부 대신에 임용했다. 궁내부 협판 이범진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친일파는 줄어들고 친러파와 친미파 등 소위 정동그룹이 기용된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돌격형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7월 13일에 조선에 온 미우라는 전(前)공사 이노우에와 함께 7월 15일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후 이노우에는 7월 29일까지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민왕후를 시해하는 ‘여우 사냥’ 작전을 꾸미다가 일본으로 돌아갔고, 미우라는 공관에 머물면서 참선에 몰두하는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