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56) - 인아거일 (引俄拒日)
조선, 부패로 망하다 (56) - 인아거일 (引俄拒日)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2.27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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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양력 4월 17일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요동 반도를 차지했다.

매천 황현 영정 (구례 매천사 내)
매천 황현 영정 (구례 매천사 내)

그런데 조약 체결 6일 후인 4월 23일에 러시아 · 독일 · 프랑스 3국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왔다. 삼국간섭(三國干涉)이었다. 4월 29일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 반도 반환을 결정했고 그 대신 청나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러시아의 기침 한 번에 일본이 독감에 걸린 것을 본 민왕후는 열강의 역학관계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민왕후는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척)을 추진했다.

5월 13일(음 4월 23일)에 고종은 친일파의 거두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조희연을 파면하였다. 거일(拒日)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민왕후는 인아뿐만 아니라 친미도 추구했다. 1895년 5월 28일에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직하자 고종은 친미파인 학부대신 박정양을 총리 대신에, 이완용을 학부대신에 임명했다. 이는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의 영향이 컸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살린 선교사 알렌은 박정양 · 이완용과 함께 워싱턴의 주미한국 공사관에서 근무한 외교사의 증인이다. 그리하여 알렌은 8월에 노다지 금광인 평안도 운산 금광 채굴권을 획득했다.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p 162)

7월 6일(음 5월 14일)에 내부대신 박영효의 역모 사건이 터졌다. 박영효는 고종의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노우에가 천거한 친일파의 몰락이었다.

당시에 고종 부부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의 부인 그리고 손탁 여사 등의 세련된 외교술로 인해 ‘인아거일’이 확고해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음력 7월 3일(이하 음력이다)에 고종은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민영순, 민형식, 이용태, 김문현, 조병갑 등 279명을 사면하였다. 민씨 척족을 다시 기용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민왕후의 입김이 컸다.동학농민전쟁을 야기시킨 조병갑·김문현 ·이용태 등과 민영준·민형식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을 사면하다니. 이 점에서 고종의 이중성이 엿보인다. 더구나 민영준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병조판서를 한 역사의 죄인이었다.

음력 7월 5일에 고종은 김홍집을 다시 총리대신에, 박정양을 내부 대신에 임용했다. 궁내부 협판 이범진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친일파는 줄어들고 친러파와 친미파 등 소위 정동 그룹이 기용된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돌격형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를 주한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7월 13일에 조선에 온 미우라는 전(前) 공사 이노우에와 함께 7월 15일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후 이노우에는 7월 29일까지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민왕후를 시해하는 ‘여우 사냥’ 작전을 꾸미다가 일본으로 돌아갔고, 미우라는 공관에 머물면서 참선에 몰두하는 척했다.

8월 16일에 내부 협판(차관) 유길준은 의주부 관찰사로 밀려났고, 8월 17일에 궁내부 협판 이범진이 농상공부 대신에 임용되었다. 친일파가 완전히 숙청된 것이다.

이어서 민씨 일파는 일본군 장교가 교육하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무청 순검(巡檢 경찰)을 이용했다. 이리하여 훈련대 병졸(兵卒)과 순검이 서로 충돌하여 양측에 사상자가 생겼다.

8월 19일 오전 7시 군부 대신 안경수가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키고 있는 훈련대 970명을 해산한다는 고종의 밀지(密旨)를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가서 미리 알렸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만나 분노를 터뜨렸다. 미우라는 우범선에게 다음날 훈련대와 함께 항의하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거사일을 8월 22일(양력 10월 10일)에서 8월 20일로 앞당겼다.

8월 19일 밤 경복궁에서는 사면된 민씨 척족 실세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밤늦도록 열렸다. 민왕후는 고종과 함께 달 놀이까지 즐겼다.

다음날인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경복궁 건천궁 곤녕합에서 시해된 것이다. 이는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극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을미왜변’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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