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관 5포 순회 점검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5관 5포의 전쟁 준비 상태를 점검하였다. '난중일기'에는 1592년 2월 19일부터 26일까지 9일간 5포를 순시한 기록이 나온다. 순시 일정은 다음과 같다.
2월 19일 여도진 점검 – 20일 흥양현 도착 – 21일 흥양에서 회식 – 22일 녹도진 점검 – 23일 발포진 점검 – 24일 사도진 점검 – 25일 사도진 점검 후 책임자 처벌 – 26일 방답진 점검 – 27일 본영으로 귀환
그러면 순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2월 19일
이순신은 순시를 떠나 백야곶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감목관이 있는 곳이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순천부사 권준을 만나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순신은 전라감사 조방장 시절부터 순천부사 권준과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날이 저물어서 이목구미(여수시 화양면 이목리)로 와서 배를 탔다. 여도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는 흥양현감 배흥립과 여도권관 황옥천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2월 20일
아침에 방비 실태와 전선(戰船)을 점검했다. 전선은 모두 새로 만들어 양호했고, 무기도 얼마쯤 구비되어 있었다. 오후 늦게 흥양현에 이르렀다.
2월 21일
훙양 관아에서 공무를 마친 뒤에 흥양 현감이 자리를 베풀고 활쏘기를 하였다. 조방장 정걸도 와서 인사를 하였고 능성현감 황숙도도 와서 함께 와서 술을 마시고 취하였다. 수고한 하인들에게도 술을 나누어 먹이도록 하였다.
2월 22일
아침에 일을 마친 후 녹도진(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으로 갔다. 먼저 녹도로 향하는 길에 흥양 선소에 들러 배와 장비들을 점검했다. 녹도 만호 정윤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흥양현감 · 능성현감 · 녹도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 대포 쏘는 것도 지켜 보았다.
23일
늦게 발포로 출발했다. 역풍이 불어 간신히 성 머리에 대었다.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가는데 비가 쏟아져 모두 흠뻑 젖었다. 발포진(고흥군 도화면 내발리)에 들어서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2월 24일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여 사도진(고흥군 영남면 금사리)에 도착했다. 흥양현감이 와 있었다. 배를 점검하고 나니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지냈다.
25일
사도진 점검 결과 전비 태세가 결함이 많았다. 군관과 책임을 맡은 아전들을 처벌하였다. 첨사(김완)는 잡아들이고 교수(종6품의 유학 교관)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진포 가운데에서 가장 못한데도 순찰사가 잘 되었다고 장계를 올렸다니... 죄를 제대로 검사하지 못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역풍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어 또 하룻밤을 머물렀다.
26일
아침 일찍 배를 띄워 개이도(여수시 화정면 개도)에 이르니 여도의 배와 방답의 배가 마중 나와서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도착했다. 무기를 점검한 결과 장전과 편전 가운데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어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다행히도 전선은 양호하였다.
2월 27일
아침 점검을 마친 후에 북쪽 봉우리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니, 외딴 섬에 자리잡은 방답진은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고, 성과 해자도 몹시 엉성하여 걱정스러웠다. 갓 부임한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것인가?
느지막이 배를 타고 경도(여수시 경호동)에 이르니 아우 이우신, 조이립과 군관, 우후들이 술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함께 즐기다가 해가 저문 뒤에야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 순회 점검은 부임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 이루어졌는데 전선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다.
# 전술 전략 공부
1592년 3월 5일에 서울 갔던 진무가 저물 무렵에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병서를 보내왔다. 수륙전(수陸戰)과 화공전법(火攻戰法) 등 갖가지 전술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전술이다. (1592년 3월 5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군관들에게 병서를 실제 상황에 응용할 수 있도록 숙지시켰다.
# 거북선 창제
이순신은 왜군의 장점인 백병전에 대처할 새로운 형태의 전선을 만들었는데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을 설계 · 제조한 이는 군관 나대용이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4월 12일에 함포 사격을 마쳤다. 3일 후인 4월 15일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최초의 변보(變報)를 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