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틀 후인 4월 15일 해질 무렵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통첩을 받았다.
“왜선 90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
같은 시각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곧장 장계를 띄우고 전라도 순찰사(이광)와 전라병마사(최원), 전라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경상순찰사 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이날 이순신은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 이는 ‘임진장초’에 실려 있다.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장계
4월 14일에 발송되어 오늘 4월 15일 술시(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에 접수한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에 의하면 (...) 필시 세견선으로 생각하지마는 90여척이나 많은 수가 오는 데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 당일 동시에 접수한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에는 ‘가덕첨사가 긴급히 보고하기를 왜선 150여 척이 해운대와 부산포로 향하고 있다 하였는데 필시 세견선이 아닐 것이므로 극히 염려스럽다고 하였습니다. ’
왜선 150여 척이 모두 해운대와 부산포로 향하고 있다고 하는 바, 이들은 세견선 선단(船團)으로는 심상치 아니하므로, 신(臣)도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강어귀에서 변란에 대처하고 있으며, 겸관찰사(이광), 병마절도사(최원), 전라우수사(이억기)에게도 아울러 긴급히 통고하고 변란에 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 만력 20년 (1592) 4월 15일 술시”
(이순신 지음 · 조성욱 역, 임진장초, 윤경출판사, 1997, p 15-21)
그러면 4월 16일 이후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4월 16일
이경(二更 밤 10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三道)에 공문을 보냈다.
4월 17일
궂은 비가 오더니 늦게 갰다. 경상우병마사 김성일이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후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다.
늦게 활 5순 (25발)을 쏘았다.
4월 18일
아침 일찍 동헌에 나가 일을 하였다. 순찰사 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고흥군 소재) 권관이 이미 파직되어 떠났으니 임시지휘관을 곧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즉시 군관 나대용을 발포가장(假將 임시지휘관)으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발포권관은 1592년 2월 8일에 부임하였는데, 3월 23일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발포권관은 군사를 거느릴 재목이 못되니 알아서 조치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아직은 바꾸지 않겠다고 답장을 했다. 4월 18일에 이순신이 나대용을 발포 임시지휘관으로 보낸 것은 임명한 것은 거북선을 만든 데 대한 공로로 생각되는데, 어떤 책은 거북선을 건조하라고 나대용을 발포가장으로 보냈다고 적혀 있다.)
오후 2시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양산군수 조영규)과 울산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했다. 분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경상좌병사(이각)와 경상수사(박홍)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곧바로 되돌아왔다고 하니 더욱 더 원통하였다.
4월 20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공문이 왔다.
“적의 세력이 강성하여 대적할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무인지경에 들어 온 것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지원해 줄 것을 조정에 장계로 요청했다.”고 하였다.
이날 이순신은 전라좌수군이 경상도로 출전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