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7회 이순신, 원균의 출전 요청을 거절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7회 이순신, 원균의 출전 요청을 거절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승인 2022.08.0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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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20일에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원균은 소비포 권관 이영남을 보내 출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 명령이 없다며 원균의 요청을 거절했다.

먼저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가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사실 처음에는 대규모의 왜적이 상륙하자 원균은 그 형세가 너무 큰데 놀라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하고 전선 1백여 척과 화포, 무기 등을 바다 속에 가라앉혔다. 그는 수하 비장 이영남과 이운룡 등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황망히 도망쳐서 곤양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왜군을 피하려 했다. 이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1만여 명은 모두 달아났다.

이것을 본 비장 이영남이 간언하였다.

“공께서는 수군절도사라는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신다면 후일 조정에서 죄를 물을 때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전라도에 원병을 요청하여 왜군과 한차례 싸워보고, 이기지 못하거든 그때 도망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원균은 이를 쫒아 즉시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리에게는 각자 책임을 맡은 구역이 있는데 조정의 명령도 없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경상도로 출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원균은 5,6 차례나 이영남을 보내어 간절히 요청했지만 이순신은 거절했다. 이영남이 이순신에게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통곡했다.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2015, 징비록, p143-144)

그런데 1592년 5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원균에게 간언한 이가 이운룡이고, 이순신을 찾아간 이는 이영남으로 적혀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왜적들이 침입하여 오자 그 기세에 눌려서 도저히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함 100여척과 무기들을 모두 바다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도 해산시켜 버렸다. 그런 다음에 그는 홀로 옥포만호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을 데리고 남해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다가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지역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 이르는 요새지이니, 만일 이곳을 잃게 되면 곧바로 전라, 충청지방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수군이 흩어져 있기는 하나 그래도 다시 모아 영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전라도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원균은 그 계책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을 보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20번째 기사)

원균(元均 1540∽1597)은 27세인 1567년(선조 즉위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종성부사(鐘城府使)를 하였고 1591년 초에 전라좌수사에 임용되려다가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의 부친 원준량이 전라우수사, 경상좌수사, 경상좌병사,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한 무관으로 집안도 좋았다.

반면에 이순신(1545∽1598)은 원균보다 9년 늦게 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부친 이정(李貞)은 벼슬을 했는지도 정확히 알 수도 없는 집안이었다.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책에서 ‘조부 백록은 생원시를 거쳐 벼슬길로 나아갔으나 조광조등 사림파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기묘사화를 즈음해 벼슬길이 막혔고, 자녀의 혼사를 치르면서 법을 어겼다 하여 억울한 참변을 당했다. 집안의 이 같은 일을 겪게 되자 그 아버지 이정은 스스로 결심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가난을 감수한 채 평민으로 지냈다.’고 적었다. (위 책 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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