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5월 2일부터 이순신은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저녁의 군호(軍號 : 암구호)는 용호(龍虎), 복병은 수산(水山)이었다.
3일에는 가랑비가 아침 내내 왔다. 새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답장이 왔다. 오후에 이순신은 광양현감 어영담과 흥양현감 배흥립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하였다. 두 현감은 모두 분노를 터뜨렸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해남에서 수군을 끌고 오기로 함께 약속을 정했는데, 방답진의 판옥선이 첩입군(疊入軍)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전라우수사가 오는 줄 알고 좋아하였다. 전라우수군은 끝내 오지 않은 것이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 정운이 뵙겠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정운을 만났다. 정운은 “전라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에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 이길 길이 없습니다.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곧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李純信)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지시했다. 이순신은 마침내 전라좌수군 단독 출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은 서울에 입성했다. 선조는 4월 30일에 서울을 떠나 피난을 갔다.)
그런데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곧장 체포 명령을 내렸다. 붙잡혀 온 황옥천은 노모를 뵙고자 집에 갔을 뿐 도망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며 선처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내다 걸었다.
엄정한 군율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출전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군율이 흐트러지면 싸움은 하나마나였다.
5월 4일 새벽 두 시 경에 이순신 함대는 여수에서 출발했다. 함선은 판옥선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동원 어선) 46척 모두 85척이었다. 실제로 전투함은 판옥선 24척이었다. 협선은 비무장 연락선이고, 포작선은 고기잡이 배다. 이순신이 포작선까지 동원한 것은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대응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때도 300여 척의 왜선에 대응하기 위해 포작선을 조선 수군 전함 후방에 배치하였다.) 이순신은 본영 거북선을 이번 출전에서 뺐다. 훈련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남해안을 수색한 뒤에 미조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장선을 포함한 본대는 돌산도 북쪽을 지나 남해안 연안을 따라 평산포 · 곡포 · 상주포를 거쳐 미조항으로 향했고, 우척후(사도첨사 김완), 우부장(보성군수 김득광), 중부장(광양현감 어영담), 후부장(녹도만호 정운)등은 돌산도 남쪽의 개이도 (여천군 화정면 개도)를 수색한 후 남해안 연안을 따라 미조항에 이르도록 했다.
이는 일본 수군이 혹시라도 전라좌도 해역에 진출했을 가능성을 살피기 위한 것으로 그만큼 이순신은 신중했다.
다행히도 일본 수군은 없었다. 이순신 함대는 오후에 미조항(경남 남해군 미조면)에서 합류한 후에 소비포(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5일 새벽에 이순신 함대는 출항하여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기로 한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원균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구원을 요청한 원균이 이처럼 약속을 안 지켰으니 이순신 이하 전라좌수군은 너무 실망했으리라. 이순신은 경쾌선(가볍고 빠른 배)을 보내 빨리 당포로 나오라고 공문을 보냈다. 이 날 이순신 함대는 당포에서 정박했다.
6일 아침 8시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한산도에서 단지 1척의 배를 타고 당포에 왔다. 수하의 장수들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은 적선의 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 전투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상세히 상의했다.
조금 있다가 남해현령 기효근 · 미조항 첨사 김승용·평산포 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1척에 같이 타고, 사량 만호 이여염 · 소비포 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 만호 우치적· 지세포 만호 한백록 · 옥포만호 이운룡등은 판옥선 2척에 같이 타고 뒤따라왔다. 원균의 전함은 고작 4척 이었다.
두 도의 장수들은 연합 회의를 하여 두세 번 명확하게 약속한 뒤에,
거제도 남단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