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첫 승리를 한 이순신은 북상하여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항해하였다.
그런데 오후 4시경에 척후선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왜선 5척이 멀지 않는 바다를 지나갔습니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하여 이들을 추격했다. 이순신 함대가 한두 시간 계속 추격하자 다급한 일본 수군은 웅천 땅 합포 앞바다(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포구로 쳐들어가 왜선 5척을 분멸하였다. 사도 첨사 김완,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어영담이 각각 왜 대선 1척을, 방답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전 첨사 이응화가 왜 소선 1척을, 이순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송희립·김효성·이설 등이 왜 대선 1척을 깨뜨려 불살랐다.
이후 연합함대는 창원 땅 남포(藍浦, 창원시 합포구 구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5월 8일 아침 일찍 연합함대는 진해 고리량(古里梁)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즉시 출항하였다.
이순신은 저도(猪島)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고성군 거류면 화당리)에 이르자 왜선 13척을 발견했다. 당시 왜군은 포구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상륙하여 민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위세를 보고 겁내어 산으로 올라갔다.
이에 낙안군수 신호는 순천부 대장(代將) 유섭과 힘을 합하여 왜 대선 1척을, 순천부 소속 급제 박영남과 보인 김봉수 등이 왜 대선 1척을, 보성군수 김득광이 왜대선 1척을,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사도첨사 김완·녹도만호 정운이 각각 왜대선 1척을, 전 봉사 주몽용이 왜 중선 1척을, 이순신의 대솔군관인 전 봉사 이설과 송희립 등이 왜 대선 2척을, 군관 이봉수가 왜 대선 1척을, 군관 송한련이 왜중선 1척을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랐다. 이처럼 이순신 함대는 대선 9척과 중선 2척 등 모두 11척을 분멸(焚滅)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아침밥을 먹고 쉬려고 하는데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이신동이라는 자가 아기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므로 이순신은 작은 배로 그를 데리고와 왜군의 소행을 물었다. 이신동은 일본 수군의 약탈로 인해 가족과 헤어지게 된 사연을 눈물을 흘리면서 애절하게 말했다.
“어제 왜적들이 포구로 들이닥치더니 어염집에서 재물을 약탈하고는 모두 왜선으로 나르고 나눠 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바다에 베를 띄워 놓고는 소를 잡고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피리불고 노래했는데, 몰래 숨어 들어 보니 그 노래는 모두 본국(일본)의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에 밤새 술 마시며 놀던 왜적이 반수 가량은 남아 배를 지키고, 반수 가량은 뭍으로 올라와 고성으로 향해 갔습니다. 제 어머니와 처자는 왜적으로 인하여 서로 헤어지게 되었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이순신은 그 정상이 가련하고 적의 포로가 될 것이 염려스러워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자. 향화인 이신동은 헤어진 가족을 찾겠다며 사양했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이신동의 말을 듣고는 더욱 분노하여 힘을 합하여 곧 천성·가덕·부산 등지로 향하여 적선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지세가 좁고 얕아서 판옥선이 싸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아 조선 함대의 세력이 아직도 위태로워 원균과 상의하여 기묘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때에 전라도 도사 최철견의 첩보가 도착했다. 선조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관서로 피난 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순신 이하 여러 장수들은 비통했다
이순신은 배를 돌려 5월 9일 12시에 전라좌수영(여수)에 돌아왔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변란에 대비하라”고 타이르고 진을 파하였다.
5월 10일에 이순신은 옥포 승첩을 아뢰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1592년 5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은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승보를 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5월 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한양을 지키던 유도대장 이양원과 원수 김명원이 달아난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는 의외의 사태로 고민에 빠졌다. 조선 국왕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일본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선조는 어디로 간 것인가? 4월 30일에 도성을 빠져나온 선조는 개성을 거쳐 5월 7일에 평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