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3회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3회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승인 2022.09.19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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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한양에서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비통했다. 1592년 5월 9일에 이순신 함대는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로 돌아왔다. 다음 날(5월 10일) 이순신은 침통한 상태에서 ‘옥포에서 왜군을 무찌른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로 시작한 장계는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의 전말이 자세히 적혀있다. 적진포에서 구출한 향화인 이신동, 옥포해전에서 구출한 14세 소녀의 심문 내용과 연해안 피난민의 사정도 적었다. 또한 노획물에 대하여도 적었다.

“왜선에 실렸던 왜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다섯간 창고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며, ... 왜선에 실려 있었던 물건 중에 우리나라 쌀 300여 석(石)은 여러 전선의 굶주린 격군(格軍 노 젓는 수군)과 사부(射夫 활 쏘는 수군)들의 양식으로 적당히 나누어 주고, 의복과 목면 등의 물건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적을 무찌른 뒤에는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려는바, 아직은 그대로 두고 조정의 조치를 기다립니다.”

또한 이순신은 장계 말미에 왜적을 막는 방책에 대하여 언급한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서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오직 육전에서 성을 지키는 방비에만 진력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년 기업(基業)이 하루 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적이 만약 뱃길로 본도를 침입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군사들은 전마(戰馬)가 한 필도 없어서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야곶(여수시 화양면 백야리)과 흥양 도양장(고흥군 도양면 도덕리)에서 기르는 말(馬) 중에 전쟁에 쓸만한 말(馬)이 많으므로 이들을 차출하여 훈련시켜 전쟁에 사용한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의 독단으로 말씀드릴 일이 아님을 잘 압니다. 사태가 급하여 우선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이런 사연을 담은 공문을 보냈습니다.”

한편 ‘옥포 승첩’장계는 군관 송한련과 진무 김대수가 배편으로 서해안으로 올라가서 평양 조정에 전달되었다. 5월 23일 평양에서 이순신의 장계를 본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자하(加資)라고 명했다.

1592년 5월 23일의 ‘선조실록’이다.

“전라 수사 이순신은 주사(舟師 함선)를 동원해서 타도(他道)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가자하라고 명했다.”

한편 5월 11일 이후 2차 출전한 5월 29일까지의 이순신의 활동은 ‘난중일기’에 나와 있지 않다. 물론 다른 자료에도 없다.

그렇지만 이순신과 전라좌수군이 어떤 준비를 했을지에 대하여는 당시 상황을 종합하여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이순신은 수군들에게 일단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초긴장 상태에서 10일간 장거리 항해를 하였고 옥포·합포·적진포 3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수군들에게 며칠간 쉬게 했다. 수군들은 쉬면서 고향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정찬주의 대하 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 2’에는 나대용의 사촌 동생 나치용이 고향 나주로 특별휴가를 간 것으로 나와 있다.

둘째, 휴가를 보낸 수군들이 귀대하자 이순신은 1차 해전에서 파악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훈련을 실시했을 것이다.

셋째, 2차 출전을 위해 전선 정비와 각종 무기와 군량준비에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다행히 1차 출전에서 전선의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2차 출동을 위해 전선을 정비하고, 각종 무기와 군량 준비에 시간을 상당히 할애했을 것이다.

넷째, 1차 출전에 참전하지 못한 거북선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4월 12일에 화포 시험까지 마친 전라좌수영 본영 거북선은 옥포해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돌격장 이기남의 지휘 아래 거북선 시험 운영과 함포훈련 등을 실시했다. 이순신은 2차 출전 때는 거북선이 출전하도록 이기남을 더욱 독려했을 것이다. 아울러 돌산 방답진에서 만든 방답 거북선도 제대로 가동할 수 있도록 챙겼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방답 거북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하는 기록은 없다. (이민웅, 이순신 평전, p 143-146)

사진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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