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29회]-50일간 휴전과 진주대첩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29회]-50일간 휴전과 진주대첩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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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유경과 고니시, 50일간 휴전 협정을 맺다.

이순신이 부산포에서 승첩하던 9월 1일에 평양에서는 명나라 유격 심유경과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가 회담하여 50일간 휴전하기로 했다.

경남 진주성 내에 자리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

9월 1일에 심유경은 고니시와 평양에서 회담하였다.

고니시가 심유경에게 일본이 출병한 이유는 명나라에 봉공(封貢)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자, 심유경은 "이곳은 바로 중국 조정의 지방이니 그대들은 물러나 주둔하면서 중국 조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고니시가 지도(地圖)를 보이면서 “이곳은 분명히 조선 지역이다.”라고 말하자, 심유경은 "평상시에 여기서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까닭에 많은 궁실(宮室)들이 있다. 비록 여기가 조선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로 중국의 지경이니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윽고 고니시는 대동강 이남의 땅은 일본 영역이라고 다시 주장하면서, 봉공 요구는 황제의 허가가 필요하다하니, 심유경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기간 50일간 휴전하겠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50일간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왜군의 무리가 평양의 서북쪽 10리 밖을 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군사도 1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금표(禁標)를 세웠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9월 1일)

# 진주대첩

10월 초에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이 진주성을 지켰다.

8월에 하세가와 히데카츠가 이끄는 1만2천명의 왜군은 서울에서 김해로 남하했다. 9월 24일부터 왜군은 남해 연안을 따라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진주성을 점령해 경상도를 장악하고 전라도에서 겨울나기 식량을 확보한다는 작전이었다. 이 때 군사는 2만 명으로 불어났다.

10월 1일에 왜군은 함안군을 분탕질하고 곧 부다현을 넘어오다 조선군과 마주쳤다. 이윽고 왜군은 진주 소촌역에 진군했고 3일엔 말띠고개와 미륵벼루를 넘어 부대를 2개로 나누어 진주성을 공격했다. 진주성 싸움의 서막이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성안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염초를 구워 화약 150근을 마련하고 총통 170자루를 제조해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군사들도 모집했다. 유생 300명이 진주성을 지키겠다고 지원하는 등 모집된 군사가 3천명이었다. 김시민은 이순신 장군처럼 ‘준비된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산음의 지휘부에 머물던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은 김시민에게 전령을 보내 결사 항전을 지시했다. 아울러 김성일은 나주목사를 한 인연을 살려 호남에 의병을 요청했다. 호남과 진주는 입술과 이빨의 관계로서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곽재우·김준민 등 경상우도 의병장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자 최경회와 임계영, 곽재우· 김준민 등이 진주로 달려왔다.

조선군은 진주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의 지휘하에 성안에는 3,800여명의 군인과 약 2만 명의 백성이 있었다. 성 밖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의병들이 4천명 정도였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북면에는 심대승, 서북면에는 최경회·임계영·김준민, 서면에는 정기룡과 조경형이, 남강에는 하경해, 남면에는 정유경·이달·최강·조응도 부대가 활동했다.

그러면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6일간의 진주성 싸움을 자세히 살펴보자.

10월 5일에 왜군이 진주성 동쪽에 진을 쳤다. 김시민은 남녀노소에게 군복을 입혀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 전술을 펼쳤다.

6일에 왜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김시민은 동요하지 않고 대응했다.

7일에도 왜군은 공격했으나 성은 견고했다. 밤에 왜군은 아이들을 시켜 ‘빨리 항복하라’고 외치도록 했다. 이러자 김시민도 악공을 시켜 피리를 구슬프게 불게 해 심리전을 폈다.

8일에 왜군이 대나무 사다리로 성으로 기어오르며 공격해 왔다. 김시민은 현자총통을 쏘아 사다리를 파괴하고 진천뢰 등으로 왜적을 막았다.

9일에 김준민이 단성의 왜군 2천여명을 격퇴했다.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좌의병장 임계영도 구원병 2천명을 거느리고 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왜적은 조선 의병의 외곽 지원이 많아지자 내심 당황했다.

이날 밤 도망쳐 나온 한 아이가 내일 새벽에 왜군이 총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알렸다.

10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밤 1시에 왜군은 후퇴하는 척하다가 2시가 되자 1만명이 동문에 쳐들어왔다. 나머지 1만 명 왜군은 북문을 공격했다. 이러자 군인들은 물론 성안의 백성들 모두가 합세해 돌을 던지고 끓은 물을 붓는 등 사투했다. 새벽 동틀 무렵에 왜군의 공세가 느슨해졌다. 이때 숨어있던 왜군의 총탄이 김시민의 이마를 관통했다. 이러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나서서 적을 막아냈다. 날이 밝자 왜군은 퇴각했다.

마침내 6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 하지만 김시민은 상처가 깊어 한 달 뒤에 죽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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