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0회]- 조명연합군, 평양성을 탈환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0회]- 조명연합군, 평양성을 탈환하다.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3.03.31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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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1592년 12월 25일에 명나라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이 4만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여수가 삼도수군 통제영이 되다 벽화 (여수시 고소동)
여수가 삼도수군 통제영이 되다 벽화 (여수시 고소동)

조명연합군 5만 3천 명(이여송의 명군 4만 3천 명, 조선군은 승군 2천명을 포함하여 1만명)과 고니시의 일본군 1만 5천명은 1월 6일부터 8일까지 평양성에서 싸웠다. 이를 살펴보자.

1월 6일
평양성을 포위한 명군이 평양성 아래로 바짝 진격하여 잇달아 대포를 발사하자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명나라의 대포 중에는 불랑기포(佛狼機砲)도 포함되어 있다. 불랑기는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프랑크(Frank)족을 음차한 것인데, 당시 이 대포를 전해준 마카오 거주 포르투갈인들을 중국은 ‘불랑기’라고 불렀다.

이러자 왜적 1만여 명은 성 위에서 조총으로 응사했다.

이 날 밤, 왜적 3천여 명이 명군의 진영을 습격했다. 왜군의 습격을 예상했던 명군은 일제히 화전(火箭 불화살)을 쏘았다. 왜군은 성안으로 물러났다.

1월 7일
명군은 평양성 보통문으로 다가갔는데 왜군이 총격을 가하자 명군은 퇴각하여 왜군을 유인하였다. 이 꾀에 걸려든 왜군은 명군을 추격했다.

명군은 군사를 다시 돌려 왜군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런 소규모 전투가 하루종일 벌어졌다. 7일 저녁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명군 진영을 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1월 8일
이여송은 전군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오유충은 모란봉, 부총병 양원과 장세작은 칠성문(평양성의 북문), 부총병 이여백과 참장 이방춘은 보통문(普通門),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 낙상지는 평안병사 이일과 방어사 김응서를 거느리고 함구문(含毬門 평양성의 남문)을 공격했다.

이여송은 친병(親兵) 백여 기를 거느리고 평양성 아래로 진격한 후에 대포 1호를 발사했다. 이를 신호로 각 진에서도 일제히 대포와 화전(火箭)을 발사했다. 화전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닿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토굴은 거의 탔다.

이어서 이여송은 모든 군사를 격려하여 성에 올라가게 하니 왜군은 성안에 엎드렸다가 조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을 퍼붓고 돌덩이를 떨어뜨렸다.

왜군이 죽기로써 항거하자, 명나라 군사는 약간 물러섰다.

이여송은 퇴각하는 명군 1명을 참하여 군중(軍中)에 보이고 외치기를, “제일 먼저 올라간 자에게는 은 50냥을 준다.”하니 제일 먼저 절강성 병사가 올랐다. 이어서 낙상지ㆍ오유충 등의 군사들이 기어올라 힘써 싸우니 왜군이 견디지 못하였다.

이윽고 이여송과 장세작의 병사들이 대포를 쏘아 공격하여 칠성문의 문루(門樓)를 깨뜨리고 성안으로 들어갔고, 이여백은 함구문으로, 양원은 보통문으로 앞다투어 들어갔다.

이 때 고니시는 연광정의 토굴에 피신했는데, 칠성문과 보통문의 토굴에서 왜군이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러자 명군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이여송이 탄 말도 총탄에 맞았다.

여기에서 이여송은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왜병에게 항복한 절강 사람 장대선을 붙잡아다가 왜진에 보내어 “우리 병력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있으나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고 타일렀다. 이에 고니시는 꼭 물러갈 터이니 뒷길을 끊지 말아 주라 하였고, 이여송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니시는 밤중에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 봉산으로 패주하였다.

# 이여송,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다.
이여송은 승승장구하여 1월 10일 밤에 개성에 진을 쳤다. 1월 27일 이른 아침에 이여송은 사울로 가는 진격로를 살피기 위해 많지 않은 병력으로 벽제(경기도 고양시)로 향했다.

한편 왜장 고바야카와는 군사를 3개로 나누고, 한 개 부대를 망객현에 배치하여 약한 듯이 보이게 하고, 한 부대는 망객현 동쪽 구릉에, 나머지 부대는 서쪽 구릉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이여송의 명군이 돌입하였다. 이때 이여송 부대는 남군 포병(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 화기(火器)가 없었고, 휘하의 정기(精騎) 1천여명만 있었다.

미리 배치한 왜군 복병이 명군을 포위하자 명군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고바야카와의 선봉에 섰던 이노우에 고로베의 기병 3천 명이 이여송을 향해 돌격하였다. 왜군이 명군을 마구 살상하니 전사자가 수백 명이었고, 이비어와 마천총이 죽음을 당했다.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이여송은 파주로 도주했다. 왜군은 명군을 혜음령까지 추격했으나 양원이 포병을 인솔하여 오는 것을 보고 추격을 멈췄다.

벽제관에서 패전한 이여송은 황급히 평양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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