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1월 8일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1월 27일에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가 마냥 웅크리고만 있었다.
이 시기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1537∽1599)은 수원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울 탈환을 위해 진영을 서울 근처로 옮기기로 했다.
그는 조방장 조경을 시켜 한강 너머에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도록 했다. 조경은 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야트막한 야산을 발견했는데 이곳이 행주산성이다. 행주산성은 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남쪽은 창릉천으로서 북서쪽 구릉지대 한쪽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권율은 군사를 두 패로 나누어 4천 명을 전라도 병사 선거이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도록 하고, 자신은 조방장 조경과 함께 승장 처영이 지휘하는 1천 명을 포함한 군사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양천 일대에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변이중이 이끄는 1천 명이 주둔하고, 창의사 김천일은 강화도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쳤으며,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 진을 치고, 충청수사 정걸 또한 지원하기로 했다.
한편 조방장 조경은 산성에 성책을 쌓아야 한다고 권율에게 건의했으나, 권율은 명나라 군대가 많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2월 8일에 양주에 머문 체찰사 정철이 전쟁 상황 논의차 권율을 불렀다. 조경은 권율이 출타한 틈을 타서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틀 만에 목책(木柵)을 제1, 제2 목책을 쌓았다. 2겹으로 쌓은 목책은 2월 9일에 완성되었고 행주 전투는 2월 12일에 있었으니 조경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한편 왜군 3만 명이 행주산성 점령에 나섰다. 서울의 왜군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권율 부대를 섬멸하여 근심의 싹을 없애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에였고 고니시 등 왜장 대부분이 참전했다.
전투는 12일 하루종일 일곱 번 싸웠는데 왜군이 참패했다.
아침 6시쯤 왜군 제1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조총부대를 앞세워 산성을 올려다 보고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제1성책 바로 몇 걸음 앞까지 왜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선두에 있던 조선 장수가 큰 북을 세 번 울려 공격 명령을 내리자 조선군은 미리 준비한 화차로 포를 발사했다. 화차는 장성 출신 변이중이 만든 것인데 이 전투에 40량이 투입되었다.
화차는 전면과 좌, 우측 3면에 승자총통을 장착해 40발이 연속 발사되는 신 무기였다.
또한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었고, 비격진천뢰·총통(銃筒)등을 쏘아댔다. 궁수들도 일제히 활을 쏘았다. 고니시의 왜군은 조선군의 갑작스런 집중 포화공격을 받자 처참한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조금 있다가 제2대장 마에노 나가야스가 이시다 미쓰나리·마시다 나가모리·오오타니 요시쓰구 등 3봉행과 더불어 돌진하였다. 조선군은 큰 화살을 연달아 쏘아 적장 마에노의 흉부에 관통상을 입혔다. 왜군 제2대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이어 제3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공성 무기인 누대로 공격해 왔다. 누대 위에 조총수 수십 명을 올려놓고 성안을 향하여 조총을 쏘면서 나머지 군사들은 조선군 진지에 근접시키지 않는 신중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방장 조경은 지자포를 쏘아 누대를 깨뜨리고 또 포전 끝에 큰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왜군은 공격을 주저하면서 게걸음 작전으로 피하였는데, 조선군이 비격진천뢰로 공격하니 왜군들은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왜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제3대도 퇴각하고 말았다.
왜군이 제1성책(城柵)도 돌파하지 못하자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매우 분노하였다.
마침내 우키다가 손수 왜군을 이끌고 최선두에 섰다. 그의 소속 제4대 군사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돌진하였다.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응전하였다.
그렇지만 왜군의 공세가 너무 강하여 제1 성책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군은 여세를 몰아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권율은 북을 울리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는 도망가는 조선군 두어 명을 칼로 베면서 큰 소리로 싸우도록 명령하니 조선군은 도망갈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힘껏 싸웠다. 이윽고 조선군은 화차의 총통을 총대장 우키다에게 집중 사격하였다. 마침내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상을 당하고 부하의 부축을 받아 퇴진하였다. 또한 봉행 이시다도 부상을 입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