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을 지키는 일은 홀로서기였다. 6월 14일에 창의사 김천일은 큰 아들 김상건 · 참모 양산숙과 함께 300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이미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의 부대가 들어와 있었다. 진주성에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고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거나 여자 아니면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날 저녁 늦게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이 부랴부랴 성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명나라 군사를 상주에서 영접하던 중이었다.
6월 15일에 충청병사 황진이 해미현감 정명세, 태안군수 윤구수, 당진현감 송제, 황대중 등 군사 700명과 함께 입성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도 문홍헌, 고득뢰, 최희립과 함께 군사 500명을 데리고 왔고, 복수의병장 고종후도 부장 오유와 오빈, 김인혼, 고경형 등과 군사 400명을 이끌고 뒤따라 왔다.
전라좌의병의 부장이며 사천현감인 장윤도 남응개, 김대민, 김신민 등 이 300명의 군사와 함께, 웅의병장 이계련이 100여 명, 적개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이 300명, 태인 의병장 민여운이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광양 도탄 의병장 강희열과 강희보 형제, 해남의병장 임희진, 영광의병장 심우신 등도 진주성에 들어왔다.
이들 의병들과 군사들은 모두 합해 3,500명 정도였다. 진주성 관군 2,500명과 합하면 모두 6천 명이었고, 성안의 백성들은 6만 명 남짓됐다.
김천일은 곡식과 병기 등을 점검했다. 그는 진주목사 서예원을 불러 창고의 양곡을 계산해 보니 족히 수십만 석이 됐다. 모든 장수들은 크게 기뻐했다. “성은 높고 튼튼하며 식량은 갖춰 있고 병기도 충분하니, 여기가 바로 목숨을 바칠만한 곳이로다”라고 말하면서 사기가 높았다.
김천일은 여러 장수들과 상의해 진주성을 지킬 부대편성을 다시 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의병의 절제사,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관군의 절제사가 됐고, 총사령관은 김천일이 맡았다. 충청병사 황진이 수성장을 맡았으며 각 군 부장은 장윤, 양산숙, 민여운, 이종인, 김준민, 고득뢰, 강희보이고, 전투대장으로 강희열, 심우신, 임희진, 문홍헌, 서정후, 김인갑, 송제, 양응원, 남응개 등이 4대문에 각기 배치됐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군 상황을 살펴보자. 6월 15일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1진을 비롯해 9만 3천명의 왜군은 김해와 창원에 집결했다. 6월 16일에 선봉이 함안에 도착했다.
그때 이빈·권율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시에 무너져 달아났다. 18일에 왜군이 함안으로부터 정암나루로 건너오자, 홍의장군 곽재우는 형세가 불리해 후퇴했다.
권율·이빈·이복남 등은 물러나와 산음으로 향했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남원으로 들어갔다. 왜적은 의령에 들어가 노략질했다.
조정에서는 위급한 상황을 명군에 보고하니, 서울에 있는 이여송이 유정·오유충·낙상지 등에게 전령해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현지에 있는 명나라 장수들은 적의 형세가 막강함을 두려워해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6월 19일에 전라병사 선거이·경기도 조방장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김천일에게 “적의 군사는 엄청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니 잠깐 물러나서 몸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김천일은 “호남은 우리나라의 근본이요, 진주는 실로 호남의 방패이니,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이는 바로 호남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사수하기를 다짐했다.
이후 선거이 등은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 운봉에 진을 쳤다.
상주목사 정기룡도 상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유격 왕필적과 함께 진주성에 당도했다. 김천일은 예를 표한 뒤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6월 20일 이른 아침부터 성안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적군의 선봉 기병 200여 명이 진주성 외곽 마현에 나타나 진주성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성안에서는 복수의병 선봉장 오유와 적개의병 선봉장 이잠이 뛰쳐나갔다. 한참 있다가 이들은 적병의 목을 말안장에 차고서 돌아왔다. 성안의 군사들은 환호했다.
이를 본 명나라 왕필적과 상주목사 정기룡도 감탄하면서 의기가 대단함을 치하했다.
왕필적은 “유총병의 군사가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했으니 경들은 잘 방어하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는 이후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밤에 양산숙이 남강을 통해 간신히 성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김천일은 양산숙을 상주에 있는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은밀히 보냈다. 김천일은 급히 유정을 만난 결과를 묻자 양산숙은 침울하게 말했다.
“유총병에게 고종후 복수의병장이 써 준 글을 읽어 드렸더니, 유정은 문장 마다 힘이 넘쳐나고 곧은 기개가 서려 있어 탄복했습니다. 그러나 유정은 지원군을 보내기는 어렵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일본과 명나라 간에 강화협상이 진행 중인 데다가 진주성을 쳐들어오는 왜적의 기세가 너무 커서 군사를 출동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주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명군도 조선군도 도와주지 않았다.
홀로 싸워야 하는 호남 의병들. 어두운 그림자가 진주성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