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그 전 수년 동안 그랬듯이 우리는 달마다 한 번씩 만나 산을 등반하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함께 하고 담소를 나누고 그렇게 도타운 우의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곤 했을 것이다.
친구는 10여 년 전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부모와 사별한 자식의 마음에 상실감이 너무도 컸던가 보았다. 친구의 부친은 장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친구에게는 더 오래 사시는 어머니가 생존해 계셨다.
우울증약을 복용하면서도 별다른 기미없이 한 달에 한 번씩 친구가 차를 몰고 와 우리는 만나 우정의 한때를 즐겼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괴롭히는 그 우울증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들이닥쳐 우리의 관계를 끊어 놓고 말았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던 3년 동안 친구와 나는 전화로만 연락을 하고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지냈다. 그 사이 친구는 나처럼 일절 밖에 나가질 않고 집에서만 지냈다. 나하고 전화통화를 하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친구 부인이 대신 전화를 받아 연결해 주더니 그것마저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새 친구의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었다. 아니, 우울증이 아닌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병원을 돌아다녔는데 어떤 큰 병원에서는 파킨슨병이라고도 하고, 다른 병원에선 끝내 병명을 밝혀내지 못했다. 친구 부인에게 나는 억지로라도 바깥에 산책을 시켜 햇볕을 쬐고 맑은 공기를 들이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친구는 바깥나들이를 한사코 기피했다. 마치 밖에 나가면 코로나라도 걸릴 것처럼. 나도 그 시절에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구 부인은 내게 남편이 누구 말도 듣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종일 누워서 텔레비전만 보고 화장실에 갈 때 일어서는 것 말고는 움직이지도 않는다 했다. 나는 큰일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나하고 전화를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있었다. 건강했던 몸이 살이 쭉 빠져 전해주는 말로는 뼈에 가죽만 입혀 놓은 것 같은 모습이라 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 부인을 못살게 굴었다. 하루라도 빨리 요양병원에 입원시켜서 정기적인 의료를 청해야 한다고, 아니면 대학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집에서 누가 24시간 가료를 해줄 수 있느냐고.
요양병원에서 한달도 못 지내고 친구는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고 싶다’며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허연 입원 환자들 틈에 섞여 있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가 생각날 때면 지금도 긴 한숨을 내쉰다. 친구가 크게 앓고 있는데도 코로나 핑계로 한 번도 병문안을 가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난 코로나에 걸리면 즉사하는 것으로 알고 두려움에 떨며 그 3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친구를 찾아가 작별 인사라도 할 것을,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말았다. 친구와 함께 지낸 날들을 함께 추억하고 행복했다는 말을 전해주었어야 했는데…
어느 날 친구 부인으로부터 친구가 작고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날 흐느껴 울었다. 울면서 친구를 위해 쓴 ‘애도사’를 프린트해 가지고 문상을 갔다. 그리고 문상 온 사람들, 유족들 앞에서, 애도사를 읽어내려갔다. 그 순간 나는 친구가 관에서 벌떡 일어나 “어이, 친구. 나 안 죽었어. 자네랑 늘 같이 있을 거야.” 그런 환청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앞으로 백 년 후 지금 이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 중 몇이나 남아 있겠는가. 친구를 위해 내가 눈물로 쓴 애도사를 읽는 것을 허용한 그 짧은 시간 나는 인생이 슬픔으로 짜여진 옷감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수의를 입고 세상을 떠나야 하니까. 모두가 헤어져야 하니까.
친구는 열심히 살았고, 가족을 건사했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둘도 없던 친구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 부인은 친구의 관에 나의 ‘애도사’를 수의 품에 넣어 주었다고 했다. 인연의 모든 것에는 헤어짐이 있다며 불가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쓴다. 내게는 살아 있을 때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들린다.